그 영화 그 대사가 들어왔다, 미술 속으로

3월 14일 '화이트데이'에 전시가 열린다. 전시 제목은 'Love Actually'.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명절보다 더 챙기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영합'하려는 상업적인 전시로 보기에 딱 알맞다. 그러나 전시를 찬찬히 살펴보면 평가는 달라진다. 영화 23편의 대사를 프로젝터로 벽면에 쏘고 여기에 걸맞은 작품을 전시하는 방식에서 대중에게 가까이 가려는 미술관의 성의가 느껴진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로버트 인디애나(Indiana·85)의 대표작 'LOVE'와 수많은 영화의 입맞춤 장면 사진이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첫사랑의 추억

"첫사랑이 잘 안 되니까 첫사랑이지. 잘되면 그게 마지막 사랑이지 첫사랑이냐?"(영화 '건축학 개론') 낙심한 주인공을 위로하는 친구의 대사가 전시장 벽에 투사된다. 존 레넌의 '러브'가 흐르고, 풀밭 위 나무 한 그루는 바람을 따라 가지와 잎이 일렁인다. 바람결에 흘러가버린 첫사랑의 기억을 구현모(39)는 영상 'Love'에 담았다.

소년·소녀의 풋사랑을 그린 영화 '마이 걸'은 0부터 9까지의 숫자를 높이 85.7㎝짜리 알루미늄 조각으로 확대한 로버트 인디애나의 '1부터 0까지'(1987~2003)와 함께 제시됐다. 하나, 둘, 셋…. 일상적으로 입에 올리는 숫자의 의미와 존재감을 상기시키는 작품. 전시에서 소개된 '마이 걸'의 장면은 이렇다. "눈 감아!" "그럼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셋에 하는 거다!" "하나" "둘" "둘 반" "셋!" 그리고 입맞춤.

◇유혹과 파멸

풋풋하게 시작한 전시는 차츰 농염해진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시골 주부 프란체스카의 일상에 사건처럼 찾아온 사진작가 로버트는 이렇게 고백한다.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 나도 당신을 원하고 당신과 함께 있고 싶고 당신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요." 나흘간의 짧은 일탈적 사랑을 작가 임정은(49)은 색색 유리조각으로 커다란 하트로 표현한다. 'Alice in Wonderland_♥2007Nov'다.

그리고 파멸. "그는 뱀처럼 내 안으로 파고들어와요. 그 뱀은 심장까지 공격하죠. 하지만 언젠가 내 심장이 굴복하고 말 것 같아요." '색, 계'에서 적(敵)을 사랑하고 만 여인 왕치아즈는 이렇게 고백한다. 장지아(40)의 사진 'Sitting Young Girl'은 뱀장어가 가득한 유리항아리에 나체로 걸터앉은 소녀의 뒷모습을 찍었다. 남근(男根)을 연상시키는 사나운 뱀장어는 순진한 소녀의 몸을 꿰뚫고, 그녀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 것만 같다.

◇지나간 사랑의 회한

"그 시절은 지나갔고, 이제 거기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 '화양연화(花樣年華)'에서, 여자와 이별한 남자는 이렇게 뇌까린다. 불같은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재처럼 남는 회한. 하트 모양 분홍색 캔버스에 진짜 나비를 접착제로 붙인 데미안 허스트(Hirst·48)의 2000년작 '무제'가 이 허망함을 상징한다. 박제된 채 사멸하였으나 여전히 아름다운 것들이 주는 씁쓸함이다.

'사랑=하트'라는 도식을 반복한 작품이 여럿 발견되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기획자 이주헌(52) 관장의 스토리텔링 능력이 돋보이는 전시다.

전시를 보고 나오면 달리(Dali· 1904~1989)의 새빨간 '메이웨스트 입술 소파'가 설치된 '키스 존'이 관객을 맞는다. 연인들에게 주는 서비스다. 서울 부암동 서울미술관, 3월 14일~6월 16일. 입장료 성인 1만원 등. (02)395-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