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생활의 한 가운데 한 권의 아름다운 책을 놓고 싶다

  • 정지현 시니어조선 편집장
  • PHOTOGRAPHER 이신영(C.영상미디어)

입력 : 2013.03.27 09:37

PEOPLE | 한길사 김언호 대표

책을 읽고 저자와 토론하며 정신을 만들고 이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출판인의 역할이라는 김언호 대표. 한길사를 창립한 이래 37년째 책에 파묻혀 사는 그는 책 속 유토피아 예찬론자다. 책을 만드는 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책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그를 만났다.

“젊은이들이 디지털에 함몰되어 책을 놓아버렸다.”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첫마디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이야기는 출판문화의 위기에 관한 것이 아니라 이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출판문화 창출을 위한 계획과 시도에 대한 것으로 이어졌다. 김 대표다웠다. 그는 우리나라 인문사상서의 대표적 출판사 한길사를 37년간 이름 그대로 ‘한결같이’ 이끌어 오고,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헤이리 예술마을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던가. 가치있고 필요한 일이다 싶으면 열정을 갖고 추진하는 그에게 비관론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듯 보인다.

출판도시 내 자리한 한길사 사옥 김언호 대표 사무실에서.
“책은 여러 기능을 한다. 삶에 필요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한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간존재의 근원을 탐구하게 한다. 재미있는 오락을 제공한다. 개인적·사회적 삶에 요구되는 사상과 신념과 이데올로기를 우리는 책으로부터 얻는다. 한 시대 한 사회를 진보시키는 살아있는 이론과 사상을 창출해내는 것은 책을 통해 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김 대표에게 책은 조건 없는 사랑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시절, 시골 고향집에는 책이 흔치 않았다. 그러다 고등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하면서 그간의 갈증을 풀 수 있는 곳을 발견했다. 다름 아닌 보수동 책방거리. 책들이 쌓여있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황홀했기에 시간만 생기면 그의 발길은 늘 그곳을 향했다.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상경한 뒤에는 청계천, 인사동 책방거리를 기웃거리며 헌책을 구입했다.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에도 돈이 생기면 책을 샀다. 1975년 ‘동아투위’ 사건으로 타의에 의해 언론을 떠나게 됐지만 전화위복이 되었다. 출판사를 내면서 책과의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헤이리 북하우스는 2,3층으로 편안하게 걸어 올라가면서 책을 볼 수 있도록 꾸몄다.
책박물관은 영혼에 영양을 주는 공간

4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무덤덤해질 법도 한데, 책을 향한 김 대표의 마음은 식을 줄을 모른다. 헤이리 북하우스에 개관한 한길책 박물관은 사랑의 증표와 같다.

“한국 지성사의 중요한 인물인 함석헌 선생을 비롯해 출간하는 책의 80%가 동서고금의 위대한 사상가를 다루는 인문학 서적이다. 우리가 만든 오래된 책들, 어려운 시절 검열 받았던 책들, 검열에 걸려 결국 출판하지 못했던 책들, 저자들의 흔적이 느껴지는 육필 원고…. 이런 것들을 한 자리에 모아 보여준다면 젊은이들을 위한 정신 교육의 장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박물관은 화석화된 곳이 아니다. 아름답고 오래된 책, 그 오래된 책의 향기를 느끼며 영혼에 영양을 주는 공간이다.”

윌리엄 모리스의 <초서저작집>,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천일야화> 등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고서를 전시 중인 헤이리 한길책박물관.
책박물관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우리나라 출판 역사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가 소장한 희귀하고 가치 있는 책을 공유하기 위한 곳이기도 하다. 여행이나 업무 차 해외에 나가면 그는 책과 관련된 지역이나 전시장, 고서점을 꼭 찾는다. 그러다 만난 윌리엄 모리스! 19세기 후반에 살았던 윌리엄 모리스는 시인이자 화가이며 건축가이자 공예운동가이며 자본주의 물질만능을 비판한 사회주의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책의 장인’이다. 김 대표는 모리스의 책을 처음 본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어떻게 책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가’ 싶은 게 책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작품 같았다고.

“좋은 콘텐츠를 아름다운 그릇에 담으면 더 큰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책의 기능이 시공간을 넘어 지식과 정신을 창출·전승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형식의 아름다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윌리엄 모리스의 책은 아름다운 문자로 편집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예술 작품이다.”

김 대표는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책 중 하나로 평가되는 <초서 저작집>을 비롯해 윌리엄 모리스의 책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이 외에 각기 다른 삽화와 화려한 장정으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된 <천일야화>, 화가 귀스타브 도레의 삽화책 원본, 18~19세기에 발행된 신문·잡지 등 자신이 수집한 많은 자료를 여러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들은 현재 한길책박물관 전시 중이다. 뿐만 아니라 한길책박물관은 단순히 소장품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책의 역사를 통해 옛 장인들의 지혜 와 책의 아름다움을 배울 수는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윌리엄 모리스의 <초서저작집>,세계 각국에서 출간된 <천일야화> 등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 고서를 전시 중인 헤이리 한길책박물관.
출판도시는 지식과 문화에 관한 담론을 나누는 공간

“출판인들과 더불어 출판문화운동을 전개하며 새로운 책의 시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때로, 왜 이렇게 나서는가에 대해 스스로 질책도 하고 반성도 해본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를 새로운 차원으로 일으켜 세우는 데 출판은 가장 중요한 인프라다. 출판문화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최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취임한 만큼 그의 출판문화운동 활동은 더욱 활발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출판 관련 업체 160여 곳이 모인 파주출판도시가 지금까지 책을 만들어내는 이들만의 공간이었다면 이제는 이곳을 독자와 함께 누리는 공간으로 변모시키고자 한다. 그 첫 단계로 출판도시에 입주한 출판사의 사옥 1층에 책방을 만드는 ‘책방거리’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또한 북소리 조직위원장을 맡아 2011년부터 독자, 저자, 출판인이 함께하는 지식축제 ‘파주북(book)소리’를 개최하고 있다.

인간이 만든 가장 아름다운 책 중 하나로 평가되는 <초서저작집>. 윌리엄 모리스의 목판 석표지, 테두리 장식화, 머리글자가 돋보인다.
“출판도시를 그저 출판사들이 모여 있는 ‘출판단지’가 아닌 지식과 문화 예술에 관한 담론을 나누고,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 것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거대한 캠퍼스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책을 매개로 다양한 강좌가 열리고 사람들이 만나 대화·토론하고 공연을 즐기면서 지식과 문화를 창출하는, 일종의 ‘열린대학(Open University)’과 같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


김언호 대표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으며, 1976년 한길사를 창립했다. 1980년대 후반부터 파주출판도시건설에 참여했고, 1990년 중반부터는 예술인마을 헤이리를 구상하고 건설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98년 한국출판인회를 창설하고, 2005년에는 한국·중국·일본·대만·홍콩 등. 동아시아 인문학 출판인들과 동아시아출판인회의를 조직했으며, 2011년부터 파주출판도시에서 진행되는 책축제 ‘파주북소리’ 공동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직책이 더해져 책과 더불어 가는 그의 행보가 더욱 바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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