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강우석 "내가 한물갔다고? 천만에"

이 시점에서 강우석 감독이 '전설의 주먹'(4월 10일 개봉)을 내놓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한때 대단했다'는 것을 '전설'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 제목은 최근 그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강 감독은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1989) '투캅스'(1993) '공공의 적'(2008) 등 연출하는 작품마다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고, 한국의 첫 1000만 관객 영화 '실미도'(2003)를 만들었다. 그가 세운 영화사 '시네마 서비스'는 1000만 영화만 두 편(실미도, 왕의 남자)을 내놨다. 하지만 최근 '이끼'(2010) '글러브'(2011)의 흥행 부진과 시네마 서비스의 경영난은 그를 '전설의 감독'으로 만드는 듯했다. 이 영화에서 과거의 싸움꾼들이 다시 모여 '최고'를 가리는 싸움을 하는 것처럼, 강 감독도 이번 영화에 승부를 걸려 한다.

'전설의 주먹'은 그가 전설이 되기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대중이 공감할 만한 캐릭터로 뼈대를 세우고 감칠맛 나는 영화적 살을 붙여내는 재능은 여전하다. 거기에 비루한 40대 가장을 내세운, 전형화된 가족주의를 다루면서도 '청소년 관람 불가'를 이끌어낼 정도의 센 액션으로 말초 신경을 자극한다. 지금의 대중이 상업영화에서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그는 전설이 아닌 '현재진행형'일 수밖에 없다.

"학교 다닐 때 잘 나갔던 애들 뭐 하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최근 서울 충무로에서 만난 강 감독이 대뜸 물었다. 동명의 원작 웹툰을 각색한 '전설의 주먹'은 고등학교 때 싸움으로 전설이 된 이들이 중년이 되어 TV에서 중계하는 파이트쇼에서 만나 다시 싸운다는 내용. 황정민, 유준상, 윤제문 등이 링에 오르는 왕년의 싸움꾼들이다. "이 나이 되니, 고등학교 때 공부는 안 하고 싸움만 하던 친구는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져요. 이 영화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담아냈어요."

◇"속도보다 角이 문제"

'공공의 적' '투캅스' 등 대중들이 열광했던 그의 영화는 다 빨랐다. 이야기 전개도 화면도 속도는 빠르되 숨이 가쁘진 않았다. '전설의 주먹'도 153분의 상영 시간이 길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달린다. 강 감독은 "여러 등장인물이 나오고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다 보여줘야 하는 작품이다. 쓸데없는 데 시간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다"고 했다. '속도 집착'에 대해 그는 "원체 성격이 급하다. 속도가 느린 '이끼'를 찍을 때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했다.

"사실은 속도보다 각(角)이 더 문제예요. 영화를 보고 '좋은 영화네'가 아니라 '와, 골 때리네'란 반응이 나오게 하는 게 바로 각이에요. 제가 지금 각이 살아있는 영화를 내놓지 못한다면 전 끝입니다."

속도 얘기를 여러 차례 꺼내는 그에게 "혹시 후배 감독들의 추격에 조바심이 생긴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의 두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나 한물갔나, 하는 그런 생각 말인가? 그런 생각한 적 없다"고 했다. "한국 감독들의 정말 좋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지만, 저와는 색깔이 분명히 달랐습니다. 박수는 쳐줬을지언정 위협을 느낀 적은 없어요. 조용필씨는 환갑을 넘겼지만,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아름답습니다. 저는 늙었지만, 제 연출은 젊은 것처럼요."

◇"번 돈 다 썼다. 영화에"

강 감독은 '투캅스'가 대성공을 거둔 1993년 강우석프로덕션을 설립해 투자·제작·배급에도 나섰고, 2년 후 시네마서비스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이 회사는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대기업 자본과의 긴장 및 대결, 협력 관계를 거듭하며 풍파에 시달리기도 했다.

흥행에 대한 자신이 있다면 감독으로 연출만 해도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왜 사서 고생하냐"고 물었더니 "돈 때문"이란다. "돈이 좋아서가 아니라 돈이 없으면 어떤 영화도 만들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로 돈 벌었다고 그걸 계속 쌓아두고 있나? 그걸로 내 영화뿐만 아니라 후배 감독들도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흥행 영화로 번 돈을 영화 만드는 데 다 써버렸지만, 후회는 없어요. 목욕탕에서 마주치는 아저씨들, 가게에서 만나는 아줌마들이 돈 때문에 나를 반기는 게 아니에요. 제 영화 보고 그러는 거지. 영화계에서 떳떳하게 물러날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영화를 찍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