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렉터, 내가 '사는(buy)' 이유

#1. 1975년 홍익대 미대 졸업전. 전시장에 들른 일신방직 창업자의 아들 김영호는 '돌 그림'에 시선이 꽂혔다. 100만원에 샀다. 작가에게는 "어려운 일이 있으면 찾아오라"고 당부했다. 몇 년 후, 군 복무를 마친 화가가 그림을 들고 찾아왔다. "작업실 구할 비용이 없으니 좀 도와달라." 김 회장은 그자리에서 200만원을 주고 작품을 샀다. 같으면서도 다른 코카콜라 병 수십 개를 그린 '획일성과 자아의식'(1974)이다. 컬렉터 김영호(69) 일신방직 회장과 작가 고영훈(61)의 40년 교유는 그렇게 시작됐다.

#2. 날아보려고 몸부림치는 흰 형체가 젊은 미술 애호가의 눈을 사로잡았다. 미술잡지 표지에 실린 그림이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린 것이지만, 중력을 거스르는 무용가를 모티프로 했다는 점에 끌렸다. 젊은이는 몇 년 후, 작가의 유족에게서 그림을 어렵게 구입한다. 신성수(61) 고려산업 회장이 최욱경(1940~1985)의 '마사 그래함'(1976)을 소장하게 된 사연이다.

다음달 14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나의 벗, 나의 애장품'은 '사연 있는 그림들'을 모은 전시. 국내 미술품 컬렉터 49명이 애장품 79점을 내놓았는데, 그중 28명이 이름과 작품 소장 과정을 밝혔다. 집안 거실에, 침실에 고이 모셔져 있던 그림이 세상 밖으로 이름을 달고 나왔다.

이인희(85) 한솔그룹 고문은 자신과 비슷한 시기를 살아낸 한국 근대 작가에게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 그는 이번 전시에 김경(1922~1965)의 '쌍계(雙鷄)'를 내놨다. 황금색 닭 두 마리가 강렬한 생명력을 내뿜고 있는 그림. 이 고문은 이 작품의 흡입력과 강한 메시지에 반해 구입했다.

구정모(60) 대구백화점 회장은 동향인 이쾌대(1913~1965)에게 깊은 애정을 보였다. 이쾌대의 '부인도'(1943)를 전시에 내놓은 구 회장은 "처음엔 이쾌대가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그림에서 '조선의 양화(洋��)'를 실현해보려는 작가의 묘한 고뇌가 느껴져 구입했다"고 털어놓는다.

이 전시에 그림을 내놨던 한 기업인은 전시 직전, 이름을 거론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림=기업 비리'로 인식되는 탓일 것이다. 고가의 그림 구입은 국세청에겐 '탈세의 온상(溫床)'으로, 보통사람들에겐 '가진 자들의 사치'로 비친다. 그러나 오직 그림이 좋아 순정한 인연을 맺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전시는 소장가와 작품 간의 미묘한 화학작용, 그 '끌림'에 대한 기록이다. (02)720-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