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자로 재고, 한 땀씩 뜨고… 옷은 원래 이런 것

지춘희<사진>는 구불구불하게 말하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27일 서울 여의도 IFC 몰 2층에서 열린 2013년 가을·겨울 서울패션위크의 '미스지 컬렉션'에서 지춘희는 그저 말없이 자신의 텅 빈 작업실을 관객에게 열어 보였다. 잡다한 현혹도, 화려한 장난도 없었다. 이날 그가 보여준 옷은 담백했다. 드레스와 투피스, 정장, 그리고 코트. 모델은 다만 옷을 걸치고 전진했다. 그리고 관객은 찬탄했다.

무대는 지춘희가 평소 작업하는 의상실을 고스란히 구현한 것이었다. 한가운데엔 옷의 틀을 잡는 데 쓰는 마네킹이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틀과 모양만으로 관객은 짐작할 수 있었다. 지춘희에게 옷이란 결국 일종의 건축이라는 걸. 마름질한 원단을 이어붙여 뼈대를 세우고, 입은 사람이 제대로 숨쉴 수 있는 공간을 계산하면서, 그렇게 옷을 완성한다는 걸.

모델이 등장하면서 쇼는 더욱 명료해졌다. 영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음악이 울려 퍼졌고, 모델은 투피스를 입고 저벅저벅 걸어나왔다. 옷의 선은 크고, 둥글었다. 여유롭고 낙낙했다. 치마는 풍성하되, 요란하지 않았다. 정장은 반듯했지만 그래서 또 관능적이었다. 남성 정장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여성 정장(르 스모킹·Le Smoking)의 진수를 보여주려는 듯했다. 복잡한 무늬나 액세서리로 승부를 겨루는 대신, 지춘희는 부피를 살리고, 옷매무새를 말끔하게 다듬는 것으로 만족했다. 이야기는 그저 작은 부분에 숨겨놓았다.

모델의 목과 팔, 어깨엔 앙증맞은 둥근 장식이 여기저기 달렸다. 디자이너가 옷을 만들 때 쓰는 핀을 꽂아두는 핀 쿠션을 형상화한 것이다. 얼굴엔 치마 속을 부풀리는 데 쓰는 얇은 천을 살짝 둘렀다. 지춘희는 "평소 항상 쓰는 도구·소재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모델이 줄자 그림이 새겨진 실크 날염 블라우스를 입고 나왔을 땐, 객석은 살짝 술렁였다. 디자이너가 원단의 크기와 옷의 치수를 재는 데 쓰는, 대단할 것 없는 물건이 쇼의 주요 모티브로 쓰인 것이다. 절정(絶頂)은 줄자 드레스. 허리에서 엉덩이로 떨어지는 곡선을 강조한 검정 후프 드레스를 입은 모델이 지나갈 땐 절로 숨을 죽였다. 드레스의 절개선마다 눈금이 표시된 줄자 모양의 장식이 흘러내렸다. 옷을 완성하기 위해 줄자로 치수를 재고, 패턴을 뜨고, 손바느질을 했을 디자이너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다.

패티 라벨르(Patti Labelle)가 부르는 배경음악 '오버 더 레인보(Over the rainbow)'의 클라이맥스에서 쇼가 끝나자, 객석에선 환호와 갈채가 쏟아졌다. 지춘희는 그러나 수줍은 표정이었다. 무대 위로 잠깐 고개를 내밀었을 뿐, 얼른 무대 뒤편으로 몸을 감췄다. 나중에 만난 지춘희는 기자에게 특유의 나른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옷에 지쳐서, 옷이 너무 홍수처럼 쏟아져서, 어느덧 옷이 귀한 줄 모르는 시대에 사니까. 그냥 보여줬어. 옷이란 게 이런 거라고. 옷은 결국 이렇게 짓는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