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달린다, 내 안에 숨은 원시인을 만나러

교통수단이라고는 두 발로 걷는 것이 전부였던 잉카제국, 그곳의 길은 바위를 뚫고 가파른 벼랑을 지나 거대한 계곡 위 출렁다리로 이어졌다던가. 그런 길을 하루 종일 숨 가쁘게 달리며 온갖 소식들을 나라 구석구석까지 나르던 전령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4년 동안의 혹독한 훈련과정을 거쳐야 했다고 한다.

내가 그때 그곳에서 태어났더라면 여자 전령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엉뚱한 상상을 해보았을 정도로 혹독한 달리기 훈련을 한 적이 있다. 그것도 달리기를 시작한 지 5년이 지난 쉰이 넘은 나이에 말이다. 어느 마라톤대회를 앞두고 그때까지의 나의 기록을 깨고 싶어서였다. 또 한 가지, 달리기를 공부하듯이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출판인들의 달리기 모임인 '북커스'의 사람들을 만나는 게 즐거워서라며, 아무런 보수도 바라지 않고 코치를 자처해주었던 일명 '캅스코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경찰 직업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일주일에 세 번 꼬박꼬박 훈련을 지도해주었는데 거의 개인 특별지도에 가까웠다. 그와 함께 달리지 않는 날은 혼자서 훈련했다. 이틀만 달리지 않아도 죄책감에 시달릴 정도였다. 한겨울에는 체감온도 영하 20도가 넘는 날씨에도 칼바람을 맞으며 한강변을 달렸다. 훈련과 출장이 겹칠 경우에는 후배 도반(道伴)인 '드림스타'를 캄캄한 새벽 5시에 깨워, 동터오는 햇살이 등을 따사로이 어루만져줄 때까지 함께 달리다가 출장을 떠나곤 했다.

나의 달리기는 5개월 남짓 이어진 이 훈련 이후 비로소 자유로워졌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한 구절, '조르바, 그와 함께 있으면 일은 포도주가 되고 여자가 되고 노래가 되어 우리들을 취하게 한다'는 속뜻을 헤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혹독한 훈련 이후, 달리기는 나의 일과 나의 일상을 때때로 '포도주로, 여자로, 노래'로 느끼게 한다. 더불어 달리기는 나에게 도반의 의미를, 자연의 위로를 한층 깊게 일깨워주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곳이 나무와 꽃향기 가득한 하늘공원이나 사철 철새들이 노니는 한강변이 아니라 어느 학교 운동장이나 도로변이었다면, 도반들과 몇 시간씩 달리며 나눴던 이야기가 아름답고 즐겁지 않았다면, 달리기가 이렇게 나를 사로잡았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달리기 중에서 크로스컨트리를 좋아한다. 도반과 함께여도 좋지만 혼자라면 더욱 좋다. 숲과 산은 가까이 있는 곳이 가장 아름답다 했던가. 회사 뒤에는 6㎞ 남짓의 심학산 둘레길이 있다. 집 근처로는 고려산 능선이 높낮이가 심하지 않고 길어서 좋다. 몸이 부르는 속도에 맞춰 몸이 원하는 시간만큼 산길을 혼자서 달리다 보면 달리기는 어느새 명상으로 바뀌고, 나는 깊은 심연의 한 마리 작은 물고기가 되어 지느러미를 저어간다. 고통스러운 일과 철저하게 마주하고, 분노가 이는 일을 칼날처럼 냉정히 톺아보고, 숙제처럼 던져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함께 헤엄치던 나무와 하늘과 바람과 돌멩이와 새들은 어느 새 내 마음 밭 소리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향(香)아 허물어질가 두렵노라 얼굴 생김새 맞지 않는 발돋움의 흉낼랑 그만 내자/ 들국화처럼 소박한 목숨을 가꾸기 위하여 맨발을 벗고 콩바심 하던 차라리 그 미개지에로 가자 달이 뜨는 명절 밤 비단치마를 나부끼며 떼 지어 춤추던 전설 같은 풍속으로 돌아가자 냇물 구비치는 싱싱한 마음 밭으로 돌아가자"(신동엽 시 '香아' 중에서)고. 달리기는 확실히 원시성을 갈구하게 만든다.

☞강맑실

‘맑실’은 한글을 사랑하던 부친이 ‘맑은 골짜기’라는 뜻으로 지어준 이름. 한신대 신학과를 졸업했고 한국신학연구소에서 번역과 편집일을 하다 1987년 사회과학 출판사인 사계절에 입사했다. 1995년부터 사계절 대표를 맡아 어린이·청소년 분야를 개척하고 키워냈다. ‘누가 내 머리에 똥쌌어?’ ‘마당을 나온 암탉’ 등이 대표작. 출판인회의 산악회장을 맡고 있다. 강화도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