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 규제 틈새로… 골목 파고든 '일본 수퍼'

지난 29일 오후 5시쯤 부산 해운대구 재송동 주택가 이면 도로에 있는 한 수퍼마켓. 'trabox(트라박스)'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과일이나 음료수, 야채 등을 산 뒤 입구를 나서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2만원 이상 무료배달'이란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한 주부는 "걸어서 와 대형 마트만큼 싼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어 자주 온다"고 했다.

이곳에서 7~8㎞ 떨어진 해운대구 좌동 신시가지 안. 대형 아파트 단지들이 밀집한 도시철도 2호선 장산역 부근에도 'trabox' 매장이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면 '신라면 5개 1묶음 2950원' 등 값을 싸게 한 미끼 상품들이 놓여 있었다. 진열 상품은 거의 국산이었다. 안팎이 여느 동네 편의점·수퍼와 다름없는 이 가게는 일본계 수퍼다.

'trabox'는 본사를 일본 후쿠오카에 둔 '트라이얼컴퍼니'의 중소 편의점형 수퍼마켓 브랜드다. 일본 유명 유통업체인 '트라이얼컴퍼니'는 '트라이얼 마트(기업형 수퍼마켓·SSM)' '트라이얼 수퍼(〃)' 등 체인도 운영 중이다. 한국엔 2005년 합작회사인 '트라이얼코리아'를 통해 진출, 부산(해운대 4곳)을 비롯해 경남(창원 2곳, 함안·김해·밀양), 경북(영천), 전남(광양) 등지에 이들 3개 체인 브랜드 가게 11개를 열었다.

트라이얼코리아 측은 "국내 유명 대형 마트들이 수익이 낮아 진출하기를 꺼리는 동네나 시골에 매장을 내 박리다매 형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며 "규모는 편의점이나 동네 수퍼면서 가격은 대형 할인마트와 비슷하게 간다는 콘셉트"라고 말했다. 동네 가게와 대형 할인마트 간 틈새시장을 노린 셈이다. 트라이얼코리아 매출은 2011년 500억원에서 작년 700억원으로 늘었다.

일본 기후현에 본사를 둔 유통업체인 '바로(Valor)'도 작년 5월 부산 강서구 명지동과 경남 김해시 장유면에 '바로마트' 매장을 개설, 운영하고 있다. '바로마트' 역시 한국산 제품만 판매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이란 이름이 주는 거부감을 의식한 탓인지 'trabox' 좌동점 앞에는 '저희 트라이얼코리아는 한국 기업입니다' '일본 상품을 취급하지 않습니다' '국내 중소기업 해외 수출확대 지원' 등 글귀가 적힌 판이 달려 있었다. 주민들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분위기였다. 'trabox' 좌동점에서 물건을 사고 나오던 회사원 안모(40)씨는 "글로벌 시대에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으면 소비자에게 좋은 거 아니냐?"고 했다.

일본 유통업체들의 한국 진출은 일본의 장기 불황 타개책으로 풀이되고 있다. 일본계 수퍼의 매장은 대부분 200~300㎡의 소규모다. 이 크기면 매장 면적 3000㎡ 이상인 대형 마트나 대형 마트 소유 기업이 운영하는 SSM과 달리 국내 유통법 등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이 때문에 소상공인 단체나 주변 가게 주인들은 "대형 마트 등에 이어 일본계 수퍼들이 '동네 수퍼'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며 반발하고 있다.

'trabox' 재송점 주변에서 동네 수퍼인 '그린할인마트'를 30년째 운영하고 있는 홍재용(60)씨는 "2~3년 전 인근에 대기업 계열 GS수퍼가 들어와 매출이 줄었고 이번엔 트라박스에게 치명타를 맞았다"며 "트라박스가 원가 수준으로 파는 품목들도 있어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말했다. 사회단체인 '골목상권살리기소비자연맹'은 지난 15일 해운대 좌동 트라박스 앞에서 규탄대회를 갖고 "일본계 수퍼마켓이 교묘하게 국내법을 피해 골목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