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거리던 회사 일으킨 '베르사체의 백기사'

"디자이너 도나텔라 베르사체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라. 나머지는 신경 쓰지 마라. 다른 일은 다 내가 맡겠다!' 휘청거리는 베르사체를 일으키기 위해선 무엇보다 디자인에서 일관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지안 자코모 페라리스(Ferraris)는 현재 이탈리아 명품 회사 '베르사체(Versace)'의 CEO다. 그가 또 다른 명품 회사 '질 샌더 그룹'의 최고 경영자 자리를 떠나 베르사체로 온 건 2009년. 당시만 해도 베르사체는 방만한 경영과 적자에 허덕이던 회사였지만, 페라리스가 오고 나서 곧 흑자로 돌아서는 데 성공했다. 명품업계에서 페라리스가 '베르사체의 백기사(White Knight)'라는 소리를 듣는 이유다. 비결이 뭘까.

지난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만난 페라리스는 "디자이너가 디자인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충실히 도왔던 것뿐"이라며 빙그레 웃었다.

페라리스가 처음 CEO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베르사체는 여러모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 천재 디자이너이자 창업주였던 지아니 베르사체가 1997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연쇄살인범의 총에 맞아 세상을 떠나고 나서, 회사는 지아니의 여동생인 도나텔라 베르사체가 디자인을 총괄해왔다. 도나텔라는 오빠 못지않게 멋진 컬렉션을 내놓으면서 호평받았지만, 무분별한 라이선스 사업으로 흔들리는 회사를 원래 궤도로 돌려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페라리스는 "회사에 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디자이너인 도나텔라 베르사체의 권한을 강화시키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녀의 손을 거치지 않고는 어떤 제품도 나올 수 없도록 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서를 모두 밀라노 본사로 옮겼고, 1300명이 넘던 직원은 300여명으로 줄였다. 산만한 조직을 정리하고, 디자인에 집중했다."

베르사체만의 고유한 색깔을 살리는 데도 페라리스는 큰 역할을 했다. 페라리스는 "창업주인 지아니 베르사체와 도나텔라는 브랜드에 신화적인 아름다움과 눈부신 화려함을 입혔다. 그 특유의 개성은 강조하되, 그저 눈으로만 보는 옷이 아닌 사람들이 즐겨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영국 건축가 제이미 포버트(Fo-bert)와 손잡고 매장을 세련되고도 고풍스러운 디자인으로 바꾸고, 가방·시계·보석 디자인을 강화한 것도 페라리스의 아이디어였다. 페라리스는 "베르사체를 패션부터 가구, 호텔까지 총괄하는 라이프 스타일 브랜드로 널리 알리는 게 나의 목표였다"면서 "도나텔라와 매일 대화를 나누면서 그녀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반영했고, 그걸 충실히 디자인으로 구현하도록 했다"고 말했다.

2012년 매출 4억유로를 달성한 페라리스의 다음 목표는 한국과 일본, 터키, 러시아 같은 시장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다. 페라리스는 "한국에 직접 베르사체 제품을 들여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 시장의 반응이 우리에겐 무척 중요하다"면서 "세련되지만 역동적이고, 화려하지만 생기 넘치는 모습으로 다가서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