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 뒤집고 바늘 먼지 닦고… 우리 음악은 LP로 들어야 맛"

온라인 음원(音源) 출시야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니 필수라 하자. CD를 플레이어에 올려놓고 밀어 넣는 것도 귀찮아하는 요즘 세상 오프라인 음반만큼은 LP로만 내겠다고 선언한 거장(巨匠)들이 있다. 20분마다 판 뒤집어야 하고, 턴테이블 바늘 무뎌질세라 판에 먼지 낄세라 잔 손길이 끊이지 않는 '구시대의 유물' LP말이다.

찬탄 한쪽에 무모함에 대한 걱정도 자아내게 하는 그들. 한국 대중음악에 느릿묵직한 발자취를 남긴 이정선(63)과 엄인호(61)다.

지난 31일 저녁 두 사람이 20여년 만에 뭉친 합작 앨범 '신촌블루스 포에버(가제)' 녹음 작업이 한창인 서울 마장동 벨포닉스 스튜디오 문을 열자 시공간은 1980년대 어디쯤으로 돌아간 듯했다. 그 안에서 머리 희끗희끗해진 옛 청춘들은 호기롭게 기타 줄을 튕기고 있었다.

"우리 말이야, 솔직히 디지털 시대에 역행하는 또X이들이지, 안 그래? 하하"(이정선) "흠, 그래도 최소한 1000~1500장은 나가지 않을까?"(엄인호)

이정선과 엄인호의 인연은 포크 그룹 '해바라기'에서 활동하던 이정선·이광조가 1977년 부산에서 DJ를 하고 있던 엄인호와 결성한 그룹 '풍선'시절로 거슬러간다. 이후 둘은 고(故) 김현식 등과 1986년 서울 신촌의 카페 '레드 제플린'에서 '제대로 된 블루스 음악을 해보자'며 의기투합했다.

이 팀이 '골목길' '아쉬움' 등 명곡들을 발표하며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는 신촌블루스다. 한영애·정경화 등 숱한 디바들이 거쳐 갔다. 1990년대 이후 이정선은 동덕여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솔로활동에 매진했고, 엄인호는 신촌블루스의 유일한 정규멤버로 팀을 지켰다. '신촌블루스 포에버'에는 '환상' '한밤중에' 등 신촌블루스 초기작들의 리메이크곡과 새 노래를 포함, 20여곡이 두 장의 LP 다시 말해 A·B·C·D면에 나뉘어 실려 6월쯤 나올 예정.

녹음 작업을 하고 있는 벨포닉스 스튜디오(전신 유니버샬 스튜디오)는 딱 40년 전 제작된 이정선의 첫 음반을 비롯해 두 사람이 열혈청년이던 시절 기타 치고 노래하며 음반을 녹음하던 곳. 바로 앞엔 지하철역 출구가 있고, 저 멀리 뉴타운 공사가 한창이지만 아직도 두 사람 머릿속엔 "문 열면 코앞에 늘어선 연탄 공장에서 연기가 훅 뿜어져 나오던 곳"(이정선)이며 "다방이 많아 식사시간 되면 커피 배달하던 오토바이들이 '왱'소리를 내며 지나던 곳"(엄인호)으로 남아 있다.

LP 원판을 찍어낼 수 있는 커터, 포크·록 노래에 '우우우우~윙'하는 건반 소리를 넣어주는 하몬드 오르간, 아날로그 방식으로 음원을 담아줄 릴테이프…. 세월의 흔적이 얹힌 녹음 장비 앞에서 두 거장의 눈빛이 반짝인다. 그들에게 이번 LP 음반은 어떤 의미일까?

"사기꾼 같은 음반 기획업자 때문에 고생도 하던 시절 그래도 음악의 혼(魂)을 담아낸다는 기쁨이 있었지. 지금은 어때? 멀쩡히 살아있는데 음반은 절판되고, 가수가 죽어야 오히려 남은 음반들이 팔릴 것으로 기대되는 세태잖아. 기본으로 가고 싶었어. 공들여 만든 음악을 최고의 음질에 담는 게 기본이잖아. 영화·드라마에서 도대체 어떻게 보여줬는지 요즘 젊은 친구들은 LP가 처음부터 지직대는 줄 안다니까. 내 참."(이정선)

"오래전부터 가졌던 꿈이 이제야 이뤄진 거지. 번거롭고 불편해도 찾아서 듣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확신해. 그게 진짜 음악 듣기잖아. 이게 끝이 아냐. 내 앨범, 정선이형 앨범, 계속해서 LP로 낼 거야."(엄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