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내 친구 영희

"동창회 2부는 최영희의 노래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의 소개가 있자 영희가 무대를 향해 걸어나간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다. 그리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긴장한 기색도 없이 음정과 박자를 정확히 맞춰 부르는 '소양강 처녀'…. 예상치 못한 청아한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오우, 영희!" 하며 중간 박수가 터져 나온다. 노래는 너무 정직한 박자 때문인지 애절한 가요라기보다 동요처럼 맑다. 그래도 노래가 끝나자 동창 70~80명이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께 따듯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을 위해 어둡고 외진 방에서 낡은 녹음기 되돌리며 얼마나 많이 연습을 했을지 알 수 있는 영희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영희는 햇살같이 밝게 웃으며 내 옆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잠시 숨을 고른 후 음식이며 후식까지 부지런히 들고 와서 친구들에게 권한다.

강원도 소읍(小邑)에서 함께 자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 40년도 훨씬 지났다. 부득이 고향을 찾을 필요도 없어진 시점에서 이곳저곳 흩어져 살던 친구들은 이날을 이유 삼아 고향을 찾아든다. '나이를 먹으면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향수를 먹는다'는 말처럼 아무리 먹어도 채울 수 없는 공복감 때문에 이렇게 향수 어린 공간을 찾아드는 것인가. 어쩌면 세월이 빚은 추억이라는 사진첩 속에서 어렴풋이 되살아나는 순간들을 꺼내 볼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이날을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정지된 화면 속에서 늘 순진무구하게 웃는 영희의 얼굴처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텅 빈 운동장에서 온종일 그네를 타던 영희의 모습처럼….

영희는 초등학교 4학년부터 졸업 때까지 나와 같은 반을 했다. '빨간 머리 앤'처럼 다문다문 주근깨가 있던 희고 둥근 얼굴에 단발머리를 하고 분홍색 원피스를 즐겨 입었던 어릴 적 영희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조금 늦된 편이었다. 그런 영희를 우리는 조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담임선생님은 영희가 무슨 행동을 하든 웃음으로 맞아주셨다. 수업 중에 교실 뒷문을 열고 나가 혼자 미끄럼을 타거나 학교 앞 가게에서 과자를 사먹어도 선생님은 조금도 꾸짖지 않으셨다. 수업 시간은 물론 조회 시간이나 청소 시간까지도 자유로웠다. 그 자유가 자신에게만 특별히 주어진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희는 늘 평온한 얼굴이었다. 언제까지나 슬픔이나 고통 같은 것은 근접할 수 없을 것 같은 행복한 표정이었다. 그런 영희를 놀리거나 따돌림은 고사하고 불평하는 아이들도 없었다. 누가 특별히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친구에게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묵계 아닌 묵계가 우리 사이에 조성되어 있었던 것 같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었는데도 영희가 교실에 들어오지 않으면 선생님은 영희네 집 근처에 사는 아이들에게 책가방을 들려 보내셨다. 그러고는 "영희와 함께 숙제를 해 와야 한다"는 말씀을 잊지 않으셨다. 그 동네에 살던 건이와 찬모, 덕희가 번갈아 영희 숙제까지 거들어 해 오곤 했다.

졸업 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영희를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5년 전 가을, 체육대회가 있었던 초등학교 운동장에서였다. 줄곧 고향에서 살면서도 동창회에 참석하지 않던 영희가 그날 "보고 싶다"며 나를 찾아온 것이다.

영희의 모습에는 세월의 냄새가 역력했다. 뽀얗던 얼굴은 거짓말처럼 멀리 날아가 버렸다. 그래도 깊은 주름 속에 피어나는 미소에서 언뜻 어린 날의 그녀를 엿볼 수 있었다.

영희는 2~3평 남짓한 월세 방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형제들은 결혼하며 고향을 떠났고 어머니도 일찍 돌아가셨다. 홀로 된 아버지는 오래도록 병석을 지키다 10여 년 전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때까지 영희가 극진히 모시며 병간호를 했다. 재산은 물론 크게 배운 것도 없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공공근로뿐이기에 생활은 어렵기만 했다.

"굽은 소나무 산소 지킨다고, 영희가 바로 심청이더구나."

오래전 친정 숙모님이 대견하고 안쓰러워 혀를 차며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말을 흘려듣고 지나쳐버린 무심한 나, 그런 나를 '그리운 친구'라며 어려운 걸음으로 찾아온 영희다.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갈릴리 호수는 해발 -212m로 지구상 가장 낮은 곳에 있는 호수다. 그 호수가 산과 구름, 하늘을 가득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기 때문이다.

'겸손'과 '효심(孝心)'이 고어(古語)로 사장(死藏)되어가는 이 시대… 상처 난 조개가 진주를 기르고, 상처가 생긴 돌은 구르고 씻겨 수석(壽石)이 된다. 영희는 등이 굽어 못난 소나무가 아니라 온갖 풍상으로 생긴 크고 작은 옹이가 분재(盆栽)처럼 근사하고 나이테는 더 아름다운 한 그루 나무로 고향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