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儒學? 요즘 말로는 호의적 배려"

"배려(配慮)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타인을 위한 '호의적 배려'지요."

잠시 귀를 의심했다. 지난달 31일 서울 삼선동 윤사순(尹絲淳·77) 고려대 명예교수의 자택. '오늘날 한국에서 유학(儒學)이 어떤 의미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전통 시대의 낡은 사상처럼 여겨지던 유학에서 21세기 뉴요커들이 입에 달고 다닐 법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을 떠올리는 개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금장태 서울대 명예교수와 함께 광복 후 현대 한국 유학의 대표적인 '2세대' 학자로 꼽히는 윤 교수가 그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1200쪽 분량의 저서 '한국유학사'(전2권·지식산업사)를 최근 출간했다. 그는 '현대화한 유학'인 '신(新)실학'을 화두로 삼고 있다. "배려란 것은 공자가 말한 '인(仁·어짊)'의 실현 단초인 서(恕·남을 동정하는 마음)를 그렇게 해석한 것입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자'는 이타적인 마음가짐이지요. 이것이 옛 선비들에게만 있던 것이라고 여겨선 안 됩니다."

내친김에 좀 더 공격적인 질문을 했다.

―유학은 망국의 학문이라고들 한다.

"망한 나라의 통치 원리였기 때문에 망국의 원한을 유학에 둔 것이다. 세도정치가들에게 어디 위민(爲民)의 정신이 있었나? 오히려 유학 정신을 잊어버려서 그렇게 된 것이다."

―이 책은 '한국 유학의 특수성'에 주목했다. 하지만 한국 유학은 중국 유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아류로 평가되지 않았나?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같은 일본인이 조작한 '한국사상 부재론'의 영향일 뿐이다. 한국 유학은 중국 사상이 아니라 우리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한국 사상이다. 중국 유학을 넘어서는 뛰어난 성취는 열 가지도 넘는다."

윤 교수는 인(仁)의 정신을 실제로 '효'와 '인정(仁政)'으로 구현한 것에 한국 유학의 특징이 있다고 설명한다.

군주가 독선에 빠지지 않도록 견제하는 삼사(三司) 기구는 중국에도 일본도 없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 않는 충언과 직간의 전통도 빼놓을 수 없다. "선비의 언로(言路)가 보장된 사림 정치, 일반 백성의 뜻을 모은 공론(公論)이라는 개념 역시 한국 유학에서만 나타납니다." 이것은 실학자들에게 오면 민생을 풍요롭게 하는 후생(厚生)으로 연결되고, 이들이 노비 제도의 폐지를 주장하는 국면에 이르러서는 현대적인 인권·평등 사상과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義)의 원리 역시 한국에선 독특하게 전개됐다. 그 의리관은 임진왜란 때 의병 활동에서 정점을 이뤘고, 팽창이나 침략과는 거리가 먼 민족주의로 진화됐다. 한말 의병에 오면 군왕이 아니라 '민생에 대한 의'로 변모한다.

―그렇다면 허례허식으로 비판받는 예(禮)는 어떻게 봐야 할까.

"예는 개인의 품격을 높이고 사회 질서의 기틀, 문화의 내실화를 이루는 것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마지막 질문. 유학의 관점으로 봤을 때 현재 한국의 정치는 어떤가.

"사욕이야 그다지 없어 보입디다. 그런데 이거야 원, 언로가 너무 막혀서 말이지. 직언도 직간도 없고…. 이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