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청춘의 榮華를 찾아… 중년 오렌지族, 압구정으로 다시 돌아오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이 주는 의미는 특수하다. '소비 1번지'로 꼽히며 부(富)의 상징이 됐다.

1990년대 초 '명품' 브랜드 매장이 들어서고 '오렌지족'이라 불리는 이들이 몰려들면서 사치와 향락이 넘쳐나는 곳이 됐다. 미국 최고 명품 거리인 베벌리 힐스 로데오를 따 '압구정동 로데오(실제 행정구역은 신사동)'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압구정동을 주름잡던 오렌지족들이 '청춘'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서 이 거리도 쇠락의 길을 걸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였다.

이런 압구정동이 얼마 전부터 활기를 띠고 있다. 이제 사십 줄로 접어든 과거 '오렌지족'들이 압구정동으로 다시 돌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곳은 '향수'를 자극하는 가게들이다. 1970~90년대 음악을 듣는 '핑가스존'과 '트래픽' 카페 등이 인기를 끌면서 '전자신발', '피터 폴앤 메리' '락앤롤'등 비슷한 가게들이 생겨났다. 또 '심야식당'을 표방한 '루이쌍끄'를 비롯해 '주방 7475' '이치에' 등이 최근 1~2년 사이 문을 열면서 중장년층을 겨냥한 새로운 시장이 열리고 있다.

◇압구정동에 오면 내가 최고란 기분이 든다

압구정에서 나고 자라 '뼛속까지 오렌지'라 불렸던 직장인 김형진(41)씨. 그는 최근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를 자주 찾는다. 그가 로데오에 돌아온 건 '밥집' 때문. 단골 취향에 맞게 음식을 만들어주는 '심야식당'을 표방한 식당들이 최근에 압구정동 로데오 거리에 문을 열면서 그도 단골이 됐다. 그는 "회사에선 열등생인지 몰라도 이곳만 오면 내가 최고인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잘 나갔던' 20대 때 냄새를 이 거리에서 맡기 때문이다. "직장인이 되고 보니 세상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어요. 대접만 받던 제가 남을 접대해야 하는 입장이 돼 보니 미치겠더군요."

사표를 쓰려는 걸 말려준 게 밥집 주인이다. 친구한테 말하기 힘든 것도 여기선 편하게 말을 하게 됐다.

◇바닥까지 갔던 인생의 희망, 압구정동에서 찾아

자신을 '3개월 오렌지족'이라 칭한 음악감독 이태원(40)씨. 그가 음악 작업을 하는 작업실을 둔 곳이 압구정동이다. 20대 후반 집이 부도난 이후 다시는 안 올 것 같았던 압구정동에 그가 다시 발을 들인 것이다. 그는 "20대 때 겉멋으로 들었던 재즈에 진짜로 푹 빠져 '생계형 음악인'으로 변신했다"며 "20대의 영화(榮華)를 다시 찾아보자는 각오로 압구정동을 찾았다"고 말했다.

부산 굴지의 백화점집 아들이었던 그는 압구정동을 주무대로 삼으며 20대를 보냈다. 하지만 집안이 사기에 휘말려 모든 것을 잃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때 그를 잡아준 것이 '재즈'였다. 그는 지금 데이브 그루신, 리릿 나워 같은 재즈 대가들과 음반 작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압구정 유명 인사가 됐다.

◇압구정 회귀? 노인들이 종로에 모이는 이유와 같다

사업가 권재륜(43)씨도 '압구정동 오렌지족' 출신이다. 그는 지난해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압구정에 자스라는 바(bar)를 인수했다. 혼자든 친구들이든 편하게 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서다. 그는 일종의 '회귀 본능'을 언급했다.

"종로 탑골공원에 노인들이 모이는 게 '갈 데가 없어서'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20대였을 때 가장 최고였던 곳이 '장군의 아들'이 피튀기던 종로 일대였지요. 20대 때 가장 화려했던 시간을 생각하면서 추억을 나누고 있으면 세상 시름을 다 덜 수 있지요."

그는 또 "홍대·이태원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지만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모습에 당혹감이 들 때도 있다"며 "치열하게 인생을 살다 탈진된 느낌이 들 때 아지트 삼아 갈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니 결국 압구정으로 돌아오게 됐다"고 말했다.

◇공간을 소비하던 세대들, 이젠 안락함을 찾아

2002년 6월 로데오 거리에 '로데오 상징탑'이 세워진 그해 지금의 가로수길 근처에 '트래픽'이라는 LP 음반 카페를 연 오영길(57) 대표는 '압구정동 사랑방 주인'으로 불린다.

1975년부터 대학가 음악 다방 DJ를 했던 그에게 손님들은 선배처럼, 형님처럼 하나둘씩 마음을 열었다. 그는 지난해 압구정동 로데오 길에 트래픽 2호점을 열었다. 압구정에서 20대를 보냈던 '그들'이 조금씩 돌아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오렌지족의 '귀환'은 20대 때 체득한 '소비 습성' 때문"이라고 했다. "오렌지족은 커피값에 공간의 가치를 얹어 비싼 돈을 지불했던 첫 세대입니다. 오렌지족 덕분에 음침하고 담배연기 자욱했던 다방이 밝고 수다 떠는 공간으로 변모했지요. 이제 그들이 나이가 들어 압구정동에서 안락함을 구입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