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늦게 가면 어때요, 행복해질 수 있는데"

"홋카이도의 바닷가 마을에 '베델의 집'이라는 곳이 있어요. 지적장애인들이 설립한 회사죠. 가전제품 재활용사업장, CD·명함 제작소, 컴퓨터 수리실 등 6개의 작업장을 운영하는 데 매년 1억엔이 넘는 매출을 올립니다. 이들의 슬로건 중 하나가 '병에 걸려서 행복하다, 낫지 않기를'이지요(웃음). 그들은 자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미쳤다'는 이유로 버려진 사람들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행복을 일구는 모습을 보고 '슬로 라이프(Slow Life)'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느리게 살기, '슬로 라이프'를 처음 제창한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61)가 8일 서울에 왔다. 메이지가쿠인 대학교 국제학부 교수이기도 한 신이치는 15년 전 처음 슬로 라이프 운동을 시작했다. 지금은 슬로 푸드, 슬로 시티 운동이란 이름으로 전세계에 확장되고 있는 느리게 살기 운동이 장애인들 삶터에서 첫 싹을 틔웠다는 게 흥미롭다. "베델의 집에서 보면 일본 사회의 문제가 무엇인지 보여요. 한국도 비슷할 겁니다. 한국과 일본은 '바쁨'의 정도, 경쟁형 스트레스에서 보면 세계 1·2위를 다툴 테니까요."

'행복'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게 된 것은 조지워싱턴대를 거쳐 코넬대에서 문화인류학을 공부할 때였다. "아메리칸 인디언들, 흑인 친구들에게서 영감을 얻었지요. 주류에서 배척받고 차별받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백인들보다 불행한 걸까요? 돈과 권력은 없지만 '시간' 만큼은 그들이 훨씬 많았습니다." 행복지수(GNH) 1위라는 부탄은 슬로 라이프를 구현한 나라였다. "아홉 차례나 다녀왔죠. 경제적 풍족이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는 나라입니다."

신이치는 3·11 동일본 대지진은 인간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일깨워준 사건이라고 했다. "물, 공기, 땅이지요. 대도시의 풍족함은 환상과 같아요. 아메리칸 인디언들에게 이런 말이 있어요. '인간이 마지막 나무를 잘랐다, 인간이 마지막 생선을 먹었다, 인간이 마지막 강을 더럽혔다, 그때 알게 되었다, 돈은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종류의 개발에 반대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개발이 왜 자연을 파괴하고 사람 마음을 병들게 하면서 이뤄져야 할까요? 느리게 살자고 하면 이상주의자라고 비웃는데, 현실주의자들이 지배한 지난 200년 동안 우리는 전쟁과 경제 위기만을 반복했습니다. 이제 이상주의자들에게 바통을 넘겨도 되지 않을까요(웃음)?"

신이치 교수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도쿄에서 출판사를 크게 경영했던 아버지의 고향이 황해도다. "그 사실을 자식들이 장성한 뒤에야 알려줘 화를 냈더니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너희 몸에 자랑스러운 조선의 피가 흐른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민족이라는 사소한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더 큰 것을 위해 일하라'고."

도보여행가 김남희와 함께 한국과 일본의 오지를 여행한 뒤 펴낸 '삶의 속도, 행복의 방향'(문학동네)에도 아버지를 추억하는 내용이 곳곳에 스며 있다. "전라도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아버지의 유골을 묻은 선암사가 있기도 하지만, 주문한 음식 외에도 '이것 먹어보라, 저것 먹어보라' 하면서 음식을 가져다주던 아주머니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사소하지만 굉장히 소중한 가치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