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는 어렵다? 한번 맛보면 중독

바이올리니스트 김민(71) 전 서울대 음대 학장은 한국에서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를 가장 많이 연주한 음악인이다. 베를린 방송 교향악단 단원으로 재직했던 1977년부터 지난 2008년까지 30년간 바그너 오페라 전문 페스티벌인 독일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해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연주했다. 지난 1997년, 독일 바이로이트시(市)는 축제 20년 참석을 기념해 "당신이 연주한 바그너 오페라 공연은 362회, 리허설은 896회, 음표는 773조8331억여 개"라는 문구가 적힌 기념패를 줬다. 김씨는 "그 뒤에도 10년간 더 연주했으니 공연은 500회, 전체 음표는 1000조개를 훌쩍 넘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올해 작곡가 탄생 200주년을 맞아서 그는 다시 바그너 무대에 선다. 5월 22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바그너의 '발퀴레' 1막 연주회에서 KBS 교향악단의 객원 악장으로 참여하는 것. 별도의 무대 연출 없이 공연하는 콘서트 버전이다. 김씨는 "2008년을 끝으로 바그너와는 영영 작별이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징집영장'을 받은 노병(老兵)의 심정"이라고 말했다.

바이로이트 축제 30년 개근은 한국 연주자로는 유일무이한 기록. 하지만 서울대 재학 때는 물론, 독일 유학 시절까지 바그너는 그에게도 낯설고 어려운 작곡가였다. 김씨는 "솔직히 그 이전까지 바그너의 작품은 '탄호이저' 서곡이나 '결혼 행진곡' 정도밖에 몰랐다"고 했다.

1977년 바그너의 오페라 '파르지팔' 1막의 전주곡을 처음 연주하는 순간, 그는 등 뒤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금관 소리에 전율했다고 했다. 이 오페라가 작곡가의 마지막 작품이라거나, 성배의 기사를 주제로 희생과 구원을 담았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사랑과 증오, 욕망과 권력욕 같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을 극한까지 표현했다는 점"에 매료된 것이다.

"오르가슴 같은 희열을 느낀 겁니다. 레치타티보와 아리아로 끊기지 않고 한없이 이어지는 바그너의 '무한 선율'은 드넓은 바다와도 같지요. 이 바다에 한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날 수 없어요. 바그너의 작품만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축제에 관객들이 30~40년씩 찾아오는 건, 아마도 이 때문일 거예요."

바그너의 작품은 클래식 초심자들에게는 '접근 불가능'으로 소문났다. 하지만 그는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다른 매력이 바그너의 작품에 숨어 있다고 했다. 김씨는 "이탈리아 오페라에선 관현악이 성악의 반주 역할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지만, 바그너의 오페라에선 관현악이 성악보다 앞서서 등장인물의 갈등과 사건을 암시하고 드라마를 이끌고 간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바그너협회의 창립 멤버이자 현재 운영고문. 김씨는 "세상을 떠나는 날, 마지막 순간에는 '파르지팔' 1막의 전주곡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오는 10월 한국 초연되는 국립오페라단 '파르지팔'의 자문역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