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북앤수다] 나는 번역가… 오늘도 장미 가시 밟으며 춤을 춘다

'최고의 번역가' 중 한 명인 김석희(61)를 만나러 제주를 찾았다. 소설가 김훈은 "번역으로 집을 산 대한민국 유일의 번역가"라고 그를 정의했다. 그는 동시에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 "번역이 조강지처라면 소설은 애인 같은 존재"라 늘 말해왔지만, 최근 15년간 소설은 한 편도 쓰지 않았다. 마침 지난 7일은 그의 귀향 4년째 되던 날. 서울은 벚꽃이 망울도 채 맺히기 전이었는데, 애월읍 그의 집 앞에는 이미 난분분 낙화하고 있었다.

―(웃으며) 김훈의 정의, 동의하나?

"(껄껄 웃으며) '유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정확히는 집을 산 게 아니라 이 집을 지은 거지. 2001년에 내가 힐러리 자서전 '살아있는 역사'를 번역했다. 출판사가 급히 부탁해왔는데, 권당 인세를 받기로 했다. 한 35만부 정도 나갔나? 목돈이 들어왔고, 그걸로 고향 땅을 샀다. 땅은 힐러리가 사 준 셈이지."

250권을 훌쩍 넘기는 김석희의 번역 리스트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 쥘 베른의 '해저 2만리'등이 포함돼 있다. 각각 일어·영어·불어 원전 번역이었다.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국문과에 편입한 그는 근대시(詩)를 공부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번역은 무엇인가에 대한 당신의 정의는.

"장미밭에서 춤추기. 고통 속의 쾌락이라는 뜻만은 아니다. 번역을 위해서는 외국어 텍스트가 있어야 하고, 그걸 읽어낼 외국어 실력이 필요하고, 우리말 글쓰기로 최종 완성된다. 시와 소설은 영감만 있으면 쓸 수 있지만, 번역은 이 셋을 갖춰야 한다. 장미의 가시 같은 이 세 조건 사이에서, 춤을 추든 발버둥을 치든 해야 하는 거지."

―만난 적 없는 누군가의 글을 옮긴다는 건 어떤 기분인가.

"시오노 나나미('로마인 이야기')를 두어 번 만난 걸 제외하면, 대개의 경우는 저자와 이메일도 나눈 적이 없다. 번역은 원서가 없으면 아예 존재할 수도 없는 그림자 같은 것. 처음에는 씁쓸했지만, 점차 익숙해졌다. 나는 원서와 저자에 대한 예의를 매우 중시한다. 그래서 번역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목욕을 한다. 그냥 샤워가 아니라 목욕탕에 가서 때를 벗긴다. 먼젓번 작업의 때를 없애는 거지. 그리고 천천히 책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탐색하고, 조금씩 뒤따라간다. 번역은 겸손한 작업이다."

―우리 문학을 외국어로 옮길 때의 문제는.

"1만 단어로 쓴 소설을 2000단어 수준으로 옮기는 식이다. 그러면 청소년 소설이 되는 거다. 번역원에서도 '번역 엘리트'를 제대로 양성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번역 인력은 나아지지 않았나.

"물론. 하지만 일본과 비교해 보라. 우린 저쪽에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 재벌 사모님들이 좀 문화적 후원자가 됐으면 좋겠다. 미술관 지을 생각만 하지 말고, 엘리트 번역가 양성에 돈 좀 쓰는 거다. 그들이 한국 문학을 번역해서 노벨상을 받으면, 후원자 입장에서도 얼마나 자랑스럽겠나."

―소설가들이 번역을 많이 하고 있다. 우리 말을 잘 쓰는 사람들이니 바람직한 것 아닐까.

"독자들이 제어된 글을 읽게 되니 원칙적으로는 좋은 일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가 있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자기 문체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번역은 반대다. 원저자가 갖고 있는 문체와 글의 맛을 존중해줘야 한다. 우리로 치면 이문구와 이청준, 저쪽으로 치면 헤밍웨이와 포크너 문체가 다른 것처럼. 대강 독해만 하고 자기 스타일대로 써버린다는 것도 문제지만, 각각의 문체 차이를 구별할 실력이 안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나도 한 10년 걸쳐 100권 정도 번역하고 나니까 조금 그 맛을 알게 된 거니까."

이날 그는 처음 하는 이야기라며, "5월 1일부터 두 달 동안 충북 증평에 새로 문을 연 21세기 문학관 창작실에 들어가게 됐다"고 했다. 15년 만에 '애인'을 만난다는 고백. 다시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해병대 조교 스타일이던 목소리가 수줍은 소년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구상 중인 새 소설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아, 이 모순 가득한 예술가라니. 그런데 그 열정 가득한 모순이 그리 싫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