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최보윤 기자의 交感(교감)] '편의점 아저씨' 김능환의 한 달… 잃은 건 미소 얻은 건 시름

‘장사’라는 단어가 나오니 그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팼다. “묻지 마세요. 여긴 기껏해야 한 봉지 사도 1만원 내외니까. 팔아봐야 얼마나 판다고. 임차료 내는 것도 빠듯하고….” 그러곤 혼잣말인 듯 나직이 속삭였다. “이 가게, 언제 닫을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 아저씨’로 변신한 지 한 달. 김능환(62) 전 선관위원장의 표정에선 퇴임 때 보여줬던 것만큼 환한 미소를 찾기 어려웠다. ‘힘들다’는 내색은 안 했지만 “사람들이 홀대할 때는 슬펐다”고 말했다. 남들 보기에 영예로운 ‘대법관’이라는 자리에 올라 존경받으며 살았던 그였기에 그저 평범한 ‘편의점 아저씨’로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며 지낼 것이라곤 생각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난달 5일 퇴임한 뒤 ‘당분간’일하고 있다는 그의 일터는 25㎡(약 8평) 남짓한 편의점 매장. “부족한 듯 사는 게 맞는다”며 “적당히 할 만하다”고 말하는 그였지만 사람 하나 겨우 들어갈 듯한 비좁은 계산대 안에서 주말마다 8시간을 보내는 일은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아내 김문경(58)씨는 “요즘 들어 점점 초라해지시는 거 같아 속상하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해 4월 서울 동작구 상도동에 작은 편의점을 열었다. 또 9월엔 편의점 바로 옆에 채소 가게를 열었다. 모두 아내 김문경씨 이름으로 그가 마련해준 것이다. 그가 공직에 있는 동안 바깥일을 못했던 아내에게 '제2의 인생'을 열어주기 위해 퇴직금을 모두 털었다.

처음엔 재미도 있었다. 선관위원장을 하면서도 종종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2012년 대법관에서 퇴임하고 나서야 은행에 처음 가볼 정도로 돈에 무심했던 그가 바코드를 찍으며 현금 잔고 통을 확인했다. 기계를 만지는 게 익숙진 않았지만 조금씩 적응해갔다. 그때는 '취미' 정도로만 생각했으니 부담도 없었다.

하지만 퇴임한 뒤엔 진짜 '생계'가 됐다. "괜찮다. 살 만하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잘 안 되면 어쩌나'하는 조바심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저 아내가 좋아하고 웃는 모습을 보는 게 즐거웠는데, 임차료도 내기 어려운 형편이 되다 보니 슬슬 걱정이 밀려왔다.

지난달 23일 기자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허리가 아픈 듯 허리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 다음 날 찾았을 때도 그는 앉을 생각조차 못 했다. "하루 8시간을 꼬박 서서 일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를 건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지난달 30일 그와 처음으로 오래 이야기를 했다. '인터뷰'라는 단어만 나오면 손사래를 치고, '영업용'으로 마련했다는 빨간색 기아 모닝 승용차를 타고 자취를 감췄던 그였다. '대학 때 잠시 편의점 아르바이트 했다'는 이야기에 그도 조금씩 마음을 여는 듯했다. 그 뒤 지난 5일과 6일, 8일, 10일에도 그의 가게를 찾았다. 그와 대화는 기자와 취재원이 아닌 손님 대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의 관계로 이뤄졌다. 남색 등산용 점퍼에 체크무늬가 들어간 하늘색 목도리, 다소 펑퍼짐한 검은 바지 차림은 볼 때마다 똑같았다. 퇴임 때보다 좀 더 움푹 들어간 볼과 어느새 늘어버린 흰머리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장사가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

―장사는 어느 정도 되나요?

"그다지 잘되는 거 같진 않아요. 여기 와서 사람들이 한 봉지 왕창 사도 1만원 정도죠. 보통은 몇백원짜리 음료수나 과자를 사고. 주로 담배 장사죠."

그는 계산대 화면 한쪽을 가리키더니 '현금 보유고'라고 적혀 있는 글자를 보여줬다. "어젯밤 12시부터 오후 7시 반까지 57만원 조금 넘게 들어왔네요. 카드 받은 것도 조금 있으니까 이거보다는 좀 더 많긴 할 텐데, 이렇게 벌어서야…."

주말 비슷한 시각에 그를 찾을 때마다 들쑥날쑥하긴 했지만 현금 매출은 대략 50만원 내외였다. 금요일이었던 5일만 오후 3시쯤 50만원을 넘긴 상태였다. 2011년 기준 조사로 전국 편의점의 25.8%가 하루 매출이 100만원 이하라고 하니 그의 편의점도 그 범주 안에 드는 걸로 보였다. CU 본사 측에 알아보니 일 평균 140만~150만원 정도의 매출이 나왔다. 매출액에서 납품 원가를 뺀 매출 이익은 전체 매출액의 27~28%로 알려져 있고, 가맹 수수료는 매출 이익의 35%이기 때문에 나머지 금액을 가지고 임차료와 인건비 등을 모두 부담해야 한다. "임차료 겨우 내지"라며 쓴웃음을 짓는 그의 말이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가요?

"편의점만 있다면 모르겠는데, 옆에 (함께 운영하는) 채소 가게가 좀 부담이 되죠. 겨울엔 장사가 안 돼 내내 닫아 놨었거든요. 둘 다 임차료를 내려면…. 하지만 아내한테 경제권을 다 넘겨준 상황이라 내가 가게 운영에 간여하기도 그렇고."

그의 아내는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장사가 이렇게 힘든 건지 몰랐어요.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했나 봐요. 채소 같은 건 팔면 팔수록 손해더라고요. 3분의 1은 못 팔고 버리게 되고. 임차료는 낼 정도가 돼야 하는데, 제가 해보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상도 래미안 1차 아파트 앞에 있는 그의 편의점 고객은 주로 동네 주민으로 보였다. 주변에 대형 상가가 있거나 사무 건물이 있는 상업지구가 아니었기에 그야말로 ‘동네 편의점’이었다. 그의 편의점에서 장승배기역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똑같은 상호의 편의점이 또 있었다. 그의 편의점보다 거의 두 배 가까운 규모였다.

―근처에 CU 편의점이 하나 더 있더라고요.

“50m마다 하나씩 있는 게 요즘 실정이잖아요. 편의점이란 게 대단히 돈 벌 수 있는 곳도 아니고, 거기나 우리나 어려운 건 비슷할 거예요. 저도 아내 영업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용돈도, 아르바이트 비용도 안 받아요.”

―그간 어려운 일은 없었나요?

“밤에 술 먹고 안 좋은 모습 보이는 사람들 있다고 아내가 말하더군요. 한마디로 행패인 거지. 그래서 여자는 밤에 아르바이트를 안 시켜요.”

그는 계산대 옆 오른쪽 벽면에 걸려 있는 손바닥만 한 노란색 기기를 보여줬다.

“원래 계산대 밑에 총을 가져다 놓으려고 했어요. 위협용으로. 그런데 진짜 가져다 놓을 순 없는 일이잖아요. 고춧가루 분사기 있죠? 쏘면 눈 매워지는 거. 그걸 두려고 했는데 쏘다가 잘못하면 본인이 봉변당할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호신용 삑삑이(경보기)를 사 놨어요. 이거 보이죠? 이게 모양은 작아 보여도 소리는 우렁차서 삑 소리 한 번 나면 사람들이 당황해 하더라고요. 그런데 막상 가져다 놓으니 그다음부터는 그런 일이 없대.”

―선생님 본인이 힘들었던 적은요?

“글쎄…. 뭐랄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어요. 막 대하는 거죠. 내가 편의점 아저씨니까 홀대하는 거겠지. 어떤 순간이 와도 상대에게 최대한 예의를 지키려고 하는데, 그럴 땐 솔직히 기분 좋은 건 아니에요.”

그는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천장 쪽을 응시했다. 구체적으로 말은 안 했지만 마음 상한 일이 적잖이 있는 듯 보였다.

그의 가게를 돌보던 아르바이트생은 “모르긴 몰라도 상처 많이 받으셨을 것”이라며 “‘계산도 빠르게 못 하면서 어딜 아르바이트라고 서 있느냐’며 다그치는 손님도 더러 있었다”고 말했다. 또 “‘안녕히 가세요’라고 고개 숙여 인사하는 데도 ‘넌 뭐야’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다”고 말했다. 평생 고개 숙일 일이 별로 없었을 그에게 이런 대접이 돌아오리라곤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대법관 때와 비교하면 이 일이 하시기 어떤가요? 생활은 많이 어려워진 건가요?

“아무래도 손에 익숙지 않으니….”

―피곤하진 않으세요?

“힘들죠. 허리도 아프고.”

―어떤 사람은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어려운 게 뭐 있느냐고’들 해요.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사람들이 몰라서 하는 얘기죠. 편의점 아르바이트 일이 쉬워 보여도 꼭 그런 것만도 아니더군요. 난 식당 일은 안 해봐서 모르지만, 식당 일이 물론 체력적으로 편의점보다야 훨씬 힘들겠죠. 하지만 대부분 식당에선 ‘피크 타임’이란 게 있잖아요. 점심, 저녁때 손님 몰리고 나머지 때엔 그나마 한숨 돌리잖아요. 중간에 잠시 쉴 수도 있고. 그런데 여기선 8시간 동안 긴장 놓지 않고 계속 손님을 상대해야 하거든요. 절대 쉽다고만 할 수도 없을 거 같아요.”

그는 평일엔 아내를 도왔다. 채소와 과일 등을 구하러 새벽 시장에 다닐 때마다 아내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다. 제천·영광·하동·당진 등 ‘물건 좋다’고 소문난 곳은 다 다녔다. 짐도 모두 그가 날랐다.

그의 아내는 “몸 안 쓰던 분이 갑자기 일하려니 쉽지 않을 것”이라며 “그래도 전보다 잠은 훨씬 더 푹 잘 주무신다”고 말했다. 너무 피곤하다 보니 바로 곯아떨어진다는 얘기였다.

◇부족한 듯 사는 게 좋은 거예요

―그동안 가장 힘든 건 무엇이었나요?

“그냥 사는 거지요. 힘들어도.”

―돈 걱정도 되시겠어요.

“이전보다는 좀 못하겠지만 어쩌겠어요. 원래 부족한 듯 사는 게 좋은 거예요.”

그의 아내는 “꼬박꼬박 월급을 가져다줄 때는 몰랐는데 월급이 뚝 끊기고 장사해서 먹고살려고 하니 하루하루가 힘들다”고 말했다. ‘원해서 하는 일’이라곤 했지만 아내가 생활 전선에 나서 ‘생계’ 걱정을 하는 모습에 남편은 안쓰러워했다.

―아내 분께서 이 일 하는 거 힘들어하진 않으세요? 채소 가게 하려면 여기저기 공급처도 알아봐야 하고 쉬운 게 아닐 거 같은데.

“아무래도 사람 만나고 수다 떨고, 그런 거 하고 싶어 했으니까 아내는 좋아하는 것 같아요. 편의점이나 채소 가게나 장사는 별로 잘 안 되는 거 같지만 아내가 좋아하니 말릴 수도 없고….”

김능환 전 선관위원장은 1980년 전주지법 판사로 임용된 직후 김문경씨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그는 33년간 공직에 있으면서 아내에게 바깥일을 하지 못하게 했다.

―가정주부도 좋지만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던 거 아닌가요?

“내가 아내한테 말했죠. ‘일 만들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껏 못 한 점도 있을 테니까 이젠 아내가 원하는 대로 살게 해주고 싶어요.”

그만큼 그에게, 또 그의 아내에게 ‘공직(公職)’이란 자리는 ‘자유’도 제한할 정도로 그렇게 큰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그의 아내 가게는 전국 각지에서 구한 토마토·고구마·굴비에서부터 유기농 상추·파·미나리·쑥갓 등 채소와 많진 않았지만 참기름·마요네즈·케첩 등 조미 식품도 있었다. 직접 짠 듯 보이는 참기름엔 기름을 짠 날짜와 ‘국산’ ‘중국산’ 같은 게 적혀 있었다. 아내는 “지방 돌아다니며 좋다는 참깨를 사 가지고 와서 직접 짰다”며 웃는다.

뽀얀 얼굴의 그의 아내는 웃는 모습이 정말 착해 보였다. “젊었을 적 미인이었겠다”는 기자의 말에 김능환 전 선관위원장은 “여보, 당신 예쁘대”라며 활짝 웃는다.

―금실이 좋아 보여요.

“예전에 사람을 만나면 ‘아내랑 오누이처럼 살라’고 충고했거든요. 그런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게 다 전부는 아닌 거 같아요. 가족처럼, 오누이처럼 생각하고 살면 아내가 모든 걸 다 이해해주고 알아줄 거라 생각했거든요. 원래 가족한텐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어도 서로를 이해하고 지내잖아요. 그런데 말하지 않고 있으면 서로의 생각을, 마음 상태를 어찌 알겠어요. 그걸 깨닫는 데 5년, 10년이 걸렸어요. 속만 끓이고 산 거죠. ‘너는 왜 나를 이해 못 할까’하고. 아내도 얼마나 속을 끓였을까…. 근데 요즘엔 내 표정이 살짝만 변해도 ‘당신 무슨 일 있어요?’라면서 이야기하는데 내가 먼저 뜨끔해서. 평생 아내에게 해준 게 없으니 이제부터 노력봉사해야죠.”

그는 “아내에게 더 잘해주고 싶다”고 말을 거듭했다. 되도록 마음을 터놓고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은 부족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7월 대법관을 퇴임한 뒤 아내와 나눈 문자 메시지 이야기도 꺼냈다. 아내가 ‘수고했다’며 보낸 장문의 문자 메시지에 쑥스러운 마음에 ‘고마워요’의 앞글자를 따 ‘ㄱㅁㅇㅇ’라고 답했는데, 한참 뒤 아내는 ‘이게 무슨 뜻인지 몇 시간 고민한 후에 보내요. 가만있어라는 뜻인가요’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그의 아내는 그 이야기에 “말은 안 하셔도 항상 잘 해주세요. 많이 참아주시고”라며 말을 이었다. “길 가다가도 ‘예뻐 보인다’며 옷도 사주시는데, 공주같이 공단으로 된 옷도 사주시고, 신혼 때나 입을 것 같은 꽃분홍색 스웨터도 사주시고….”

◇주민 무료 법률 상담이 꿈이었지만

그는 “잠시 생각 정리를 하기 위해 편의점 아르바이트 생활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엇을 하고 살아야 좋을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편의점 일을 더 오래 하게 될지 어떻게 될진 잘 모르겠어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 텐데….”

―예전에 보니 공직은 물론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열거나 로펌엔 가지 않겠다고 하셨던데요.

“공직 얘기라면 다시 말하지만 선출직 및 임명직 포함해 어느 자리에도 가지 않겠다는 건 확고해요. 그때나 지금이나. 이젠 날 부르지도 않겠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안 갈 거예요. 누가 ‘당분간 공직은 없다’라는 표현을 썼던데 ‘당분간’이란 단어를 빼달라고 정정 보도 요청이라도 해야 할까요(웃음)? 하지만 공직 외의 길은 모두 열려 있어요. 로펌이든 뭐든 다 포함해서. 어떤 일을 해야 보람 있을지, 그걸 찾고 있어요. 그냥 뭘 하든지 조용히 눈에 안 띄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데….”

―“로펌 가지 않겠다”고 못 박는 뉴스가 몇번 나와서 로펌에서 모셔가고 싶어도 그런 제의 하기도 어려울 것 같아요.

“내가 가고 싶다고 해야 하는 건지, 제의가 들어와야만 갈 수가 있는 건지…. 예전부터 같이 일하자는 사람은 좀 있었어요. 여러 방면에서 고심하는 중이에요.”

―예전에 은퇴하면 동네 책방 열어놓고 무료 법률 상담해주는 게 꿈이라고 하셨던데 (그는 2006년 대법관 청문회 때 이 같은 말을 한 적 있다).

“여기도 힘든데 책방까지! 지금 책방 할 여건은 안 되니까(웃음). 내가 꿈꾸는 세상은 이랬어요. 서부영화에서 보면 이웃 주민끼리 모여 힘든 것 봐주고, 서로 상담하고 도와주고 그러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사는 게 어릴 적부터 꿈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우리나라에선 그런 모습이 그려지는 게 힘들더군요. 그렇게 되려면 동네 사람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아야 하는데, 솔직히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게 요즘 세상이잖아요. 공직도 떠나고 정해진 직업 없는 자유인이 돼서 여러 생각을 하다 보니 세상이 내 생각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도 그런 거 기대하고 찾아오는 손님도 있을 것 같아요.

“몇몇 있기는 있었죠. 판결문 같은 거 가져와서 상담하는 사람도 있고. 일단 편지가 많이 왔어요. 소송 상담을 해달라는데, 전체적으로 그 사건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여러 가지 정보가 부족하다 보니 실질적으로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더군요. 언제 한번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한테 찾아가서 여쭤보세요. 그분이 퇴임하고 최근 무료 법률 상담 자원봉사에 나섰거든. 일주일에 두 번씩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근데 아마 그분도 나랑 비슷한 입장일걸요. 내가 여기서 사람들 만나 상담해주다 보니 의외로 제대로 해줄 말이 많지 않더라고요. 난 좀 더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은데….”

◇난 평범…정의의 사도로 보지 마라

김 전 위원장은 ‘청백리’로 소문나 있다. 선관위 관계자들은 김 전 위원장이 중앙선관위원장을 하면서 받은 보수도 대부분 선관위 직원들을 위해 썼다고 입을 모았다. 잠실에 있는 작은 집 한 채 외에 별로 가진 게 없다고 했다.

―돈 많이 버실 기회도 있었잖아요.

“그런 건 있어서 뭐 하게요.”

―사람이라면 욕심도 나지 않나요?

“우리 아버지가 가르쳐 주신 게 있는데 ‘불성무물(不誠無物), 꾸준하고 성실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부앙불괴(俯仰不愧), 하늘과 땅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으라’고 하셨어요. 우리 집 가훈이에요. 이걸로 답이 될까요?”

―공직은 왜 절대 안 가신다고 자꾸 강조하세요?

“해볼 만큼 해봤잖아요. 그냥 당분간 이렇게 책 좀 보면서, 아내 운전기사 노릇 하면서 앞으로 뭐 할지 생각해 봐야죠.”

―어떤 책 읽으세요(그의 옆에는 항상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지금 읽는 책은 ‘노자타설’이에요. ‘말하지 말고, 글 쓰지 말고, 숨어 지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그걸 좀 배우려고. 도올 선생의 책 ‘중용 인간의 맛’도 좀 보고, 중국 작가 이중톈 교수 책도 좀 읽고….”

―주로 중국 철학 쪽이네요.

“어떻게 하면 좀 조용히 살 수 있을까 탐구해보려고. 난 그냥 평범한 사람인데, 언론에 너무 크게 보도되니까, 지난번(3월 퇴임 뒤 편의점 첫 출근)에 그런 일 한바탕 겪고 나니까, 부담스럽기도 하고요. 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일 했을 뿐인데, 날 특이하거나 비정상적으로 보는 시선도 있고, 튀는 행동 한다고 보기도 하고. 후배들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난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다들 우러러보는데요, 뭘요.

이 이야기에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그는 손사래를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난 ‘도덕군자’나 ‘성인군자’도 아니고 세상을 구하는 ‘사도(使徒)’도 아니에요. 하자도 많은 사람인데, 왜들 그러느냐고요. 날 그냥 있는 그대로 봐주면 안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