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먼저 섬기는 교황… 이게 새 밀레니엄이 갈 길"

"워런 버핏 같은 억만장자들이 사후(死後) 재산 기부 운동을 합니다. 또 동남아 쓰나미, 아이티 대지진 같은 재난 현장에는 세계 젊은이들이 모든 것을 걸고 남을 살리려 뛰어듭니다. 아무도 억지로 시키지 않았는데도요. 인류의 의식이 과거와 다른 수준으로 고양되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 겸손, 섬김을 강조하는 새 교황은 이런 변화의 상징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연일 파격이다. 13일에는 각 대륙에서 1명씩 뽑은 추기경들로 자문단을 구성해 교황청 개혁 작업에 착수했다. 세계사적 흐름을 관통하는 혜안을 가진 가톨릭의 대표적 석학 천주교 원로 정의채(88) 몬시뇰에게 새 교황 행보의 의미를 물었다.
―새 교황이 드러낸 시대적 의미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세 번째 밀레니엄을 맞이할 기반을 닦았다. 동구 출신으로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행보는 진보적이었다. 위대한 신학자인 베네딕토 16세는 진리의 문제에 집중했고, 교회도 '숨 고르기'를 했다. 이번 교황은 젊어서부터 스스로 실천해온 가난, 겸손, 섬김을 새 시대정신으로 제시했다. 강자와 약자, 부자와 빈자, 선진국과 개도국이 겸손하게 나누고 섬기며 함께 살아가야 할 세 번째 밀레니엄의 첫 삽을 뜬 것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첫 밀레니엄에 교회는 '하느님 앞의 평등' 메시지로 고대 노예제를 무너뜨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두 번째 밀레니엄엔 신학·철학·음악·건축·미술 등 문화의 꽃을 키웠다. 하지만 세계는 '천재 아들을 낳은 술주정뱅이 아버지'처럼 인류의 지적 고양을 감당하지 못했다. 무신론에 끌리고, 물질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인간이 인간을 착취했다. 폭력의 식민지 시대가 수백년 이어졌다. 새 교황은 식민지였던 남미 출신이지만 가계(家系)는 유럽이다. 케냐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의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이 됐듯, 그 자체로 거대한 세계사적 의미가 있다."

―예수회 출신으로 교황 명을 프란치스코로 했다.

"비대해진 교권을 비판하며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수도원 운동의 대표 인물이 프란치스코 성인이다. 예수회는 선구적 대학 교육과 세계 선교 시대를 열었다. 새 교황은 실천이 전면에 부각되는 시대정신을 드러낸다. 세상엔 한 끼니, 주사 한 대가 없어 굶어 죽고 아파 죽는 사람이 여전하다. 부자도 선진국도 겸손해져야 나눌 때 위세 부리지 않는다. 그것이 시대적 의미의 속죄이고 진정한 섬김이다. 교황은 말이 아니라 실천해야 할 때임을 이름으로도 웅변하는 거다. 그를 통해 이 시대정신은 계속 확산할 것이다."

―선진국이 개도국을, 부자가 빈자를 섬긴다는 게 이상적이긴 하지만, 가능할까.

"모두 함께 살아남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기도 하다. 지금 선진국은 잉여 생산물을 팔 데가 없다. 개도국을 발전시켜 구매력을 갖추도록 도와야 같이 살 수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에 갖는 의미는.

"아르헨티나는 나눔·겸손·섬김을 실천해온 성직자와 교회의 전통이 축적됐기에 새 교황을 낳을 수 있었다. 한국에도 훌륭한 분들이 많았지만, 더 성찰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특히 젊은이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몬시뇰님은 늘 희망을 말한다.

"옛말에 '내일에 속아 산다'고 했다. 6·25와 전후 시대에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스탈린과 히틀러 체제도 결국 무너졌고, 인류는 더 발전했다. 청년 60만명을 '문화봉사단'으로 미개척지에 내보내자고 늘 얘기해왔다. 청년은 일자리를 얻으니 살고, 새 시장을 개척하니 기업이 살고, 모두가 함께 살게 된다. 교황의 '섬김' 정신에 동참하는 길이며, 우리 스스로 희망을 개척하는 길이다. 그 근본은 인간과 자연 사랑의 실천이다."

☞정의채(鄭義采) 몬시뇰

1925년 평북 정주생으로 공산 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 1953년 사제품을 받았다. 교황청 우르바노대 철학박사로, 가톨릭대 총장과 서강대 석좌교수 등을 지냈다. 2005년 3월 몬시뇰(교황 명예 고위 성직자)로 임명됐다. 지난달 말이 사제 수품 60주년(回慶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