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회사가 정신건강박람회에 간 까닭은

지난 12~13일 이틀간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2013 정신건강 박람회' 한쪽엔 광고회사 TBWA가 차려놓은 부스가 있었다. 부스 위에는 톨스토이와 안나 카레니나의 초상 아래 '톨스토이가 묻습니다'라고 적힌 대형 배너 두 개가 걸려있었다.

이 낮선 조합의 부스에 들어서니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영감을 받아 작성한 질문들이 적힌 배너 37개가 줄지어 매달려 있었다. '사랑 없는 결혼과 부도덕한 사랑 중 반드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삶의 복잡한 문제와 갈등을 죽음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각각의 질문 아래에는 연관된 '안나 카레니나'의 대목이 인쇄돼 있었다. 현장에는 아이패드 30대가 마련돼 있어, 누구나 이것을 들고 질문에 답한 뒤 즉시 참여자 대답의 누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이 이벤트의 끝이었다. 정답도 없고 채점도 없다. 그저 까다로운 질문들과 맞닥뜨리는 체험을 제공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이벤트는 '인문학으로 광고하다'와 '책은 도끼다'의 저자인 TB WA 박웅현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톨스토이의 열혈 독자인 그는 2010년 11월 '안나 카레니나 프로젝트'를 처음 구상했다. "안나 카레니나는 '막장 드라마'이며 200년 전 러시아와 지금 서울이 다를 바 없다"는 생각으로 굴려오던 아이디어가 2년 반 만에 빛을 본 셈이다. 그가 박람회 참여자들을 대상으로 연 강연에서 한 젊은 여성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살하고 싶었다"고 말하자 박 ECD는 "안나 카레니나의 불안과 외로움에서 삶을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답했다.

 

"광고회사 방식의 사회공헌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광고회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모색하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박 ECD는 "이제 광고회사는 광고를 만드는 곳이 아니라 발상을 만들어내는 곳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인터넷과 SNS 시대에도 광고의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신문과 TV 같은 전통 매체들의 광고 효과가 하락한 것은 사실이지만, 인터넷이나 SNS가 그 자리를 메우지는 못했다. 기존의 광고 방식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플랫폼이 무한대로 확장하면서 브로드캐스팅(broadcasting)이 아니라 내로우캐스팅(narrowcasting) 시대가 됐습니다. 광고주들은 이제 '이런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구하지 않고 '뭘 해야 되느냐'고 묻습니다. 소비자들은 더 이상 설득당하지 않고 스스로 좋아서 딸려 들어갑니다. 그게 바로 '강남스타일'이고 '레 밀리터리블'이에요."

제작 1팀부터 11팀까지 있던 TB WA는 최근 박 ECD를 팀장으로 '제작 0팀'을 만들었다. 그 '0'은 '뭘 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기도 하고 '깨지지 않은 달걀 모양'이기도 하다. 이 팀의 '업무원칙'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광고를 의심한다'부터 '어처구니없는 일을 저지른다'까지 포함돼 있다. '정신건강 박람회' 역시 어처구니없는 일일 수도 있다. 박 ECD는 "If you risk nothing, you will risk everything(어떤 모험도 감수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위험해진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