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적 본능 또는 家長의 애환… 어쨌든 솔직한 '링'

한국인의 문화 여가 생활에서 ‘영화 감상’(28.6%·영화진흥위원회 2012년 조사)이 차지하는 비중은 최고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눈’은 모두 다릅니다. 한 편의 영화를 놓고 연령과 성(性)이 다른 두 기자가 각각 비교해 보는 ‘무비-아저씨 vs 아가씨’ 코너를 새로 선보입니다. 40대 후반 최홍렬 기자와 30대 초반 변희원 기자가 첫 회로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을 봤습니다. 지난 10일 개봉한 이 영화는 16일 현재 관객 80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편집자

[아저씨 曰]

40대 家長에겐 온 세상이 '링'
반칙이 더 잘 통하니 답답하지… 계급장 떼고 붙으니 링은 공정
멋있는 건 20代에 넘기라고? 이보게, 진짜 '멋'은 마흔부터야

누구에게나 전설처럼 여겨지던 때가 있다. 하지만 삶이라는 격전장을 거치고 나면 화려했던 그때의 꿈들은 사라지고 세월의 무게만 남는다. 정말, 이제 다 끝나버린 것일까.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은 40~50대 남성들에게 다시 한번 생의 의지를 불태우게 하고 잠자던 열정을 깨워주는 영화다. 고등학교 시절 화려한 무용담을 남긴 전설적인 존재였지만 지금은 현실의 벽에 부딪힌 40대들이 케이블 TV 파이트 쇼에서 다시 맞붙어 승부를 가리는 이야기다. 복싱 챔피언의 꿈이 눈앞에서 좌절된 후 혼자 딸을 키우는 국숫집 주인 임덕규(황정민), 출세를 위해 자존심까지 내던진 대기업 홍보부장 이상훈(유준상), '미친개'로 불리며 누구에게도 지지 않으려 했지만 여전히 삼류 건달인 신재석(윤제문)이 그들이다.

어디로 보나 별 볼일 없는 인물들이다. TV파이트 쇼 PD역 이요원은 "멋있어 보이는 건 20대에 맡겨두고 40대는 돈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한다. 왜 아저씨는 멋있는 것 하면 안 되나? 주인공들은 남자의 진정한 멋은 20대가 아니라 40대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방에서 옥죄어 오는 '돈'에 이끌려 '쇼'에 출연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들이 사는 세상 자체가 또 다른 링이다. 아저씨가 된 이들은 링에 오르듯 직장에 출근하고 국숫집 문을 연다. 세상이란 링은 팍팍하고 고단하기만 하다. 하나뿐인 딸이 왕따 당하고, 재벌 회장이 중역을 야구배트로 '빠따'를 때린다. 정해진 룰 대신 반칙이 더 잘 통한다.

세상살이에 비하면 주먹 하나 들고 맞붙는 링은 차라리 공정하다. 계급장 떼고, 지갑 빼고, 졸업장 무시하고 맨몸으로 만나는 무대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실패한 것을 한판에 만회할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이다. 아저씨 관객들이 스스로를 등장인물에 대입하며 영화에 몰입하는 이유다.

학창 시절 뽐내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던 그들은 이제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해 승부를 건다. '소년'이 '남자'가 된 것이다. 이 승부를 통해 과거와 화해하고 상처를 치유한다. 영화 보고 나니 고등학교 동창놈 불러내 소주 한잔 하고 싶어진다. 별 넷(별 다섯개 만점) /최홍렬 기자

[아가씨 曰]

젊으나 늙으나 왜 남자들은 '싸움짱'에 그리 집착하는지
부모 스펙이 '내'가 되는 시대, 링 위에선 오직 맨몸으로 승부
그 '原始性'이 부럽긴 하네요

이 영화를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쭉 품어왔던 의문이 풀릴 줄 알았다. 남자애들은 왜 그렇게 교실, 운동장, 골목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싸움을 벌이는 걸까.

'전설의 주먹'은 고등학교 때 유명했던, 하지만 지금은 중년이 된 싸움꾼들을 불러모아 겨루게 한다. '맞아, 그랬지'라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설정이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어느 남자고등학교나 이른바 '싸움짱'은 한둘씩 있었고, 싸움 실력과는 무관하게 이들 주위를 맴돌던 이들도 있었다. '전설의 주먹'이란 동명 원작 웹툰 제목에 혹해서 판권을 구입했다는 강우석 감독처럼, 이 제목에 혹해 영화관에 가는 남성 관객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도 '싸움짱'에 대해 품었던 근본적인 의문을 해소할 순 없었다. 왜 10대 남자들은 싸움 실력 따위로 서열을 정하려는 걸까. 따지고 보면 별 실질적인 이득도 없는 '싸움짱'을 하기 위해 왜 그렇게들 악을 썼는지 이해가 안 간다. 더 잘 싸운다는 능력으로 얻은 명예와 자존심은 참 알량하지 않은가. 게다가 싸움에서 이겨도, 져도 맞으면 아프지 않나.

어렸을 땐 학교든 길거리든, 어디서나 패기 하나로 싸웠던 남자들이 나이가 들어 돈을 위해 링에 오른다. 링에서 싸우다 목이 졸리고 뼈가 부러지며, 살이 터져 피가 흐른다. 그 링엔 철조망까지 둘러쳐 있다. 한번 올라가면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스스로 쓰러질 때까지 나올 수 없는 정글이다. 하지만 '전설의 주먹'의 처절하고 잔인한 링이 그저 부러운 젊은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천 용'이 사라지는 시대라고 한다. 실제로 취업의 바늘구멍 앞에 선 많은 젊은이는 학벌과 '스펙' 그리고 연줄처럼 스스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에서 열패감을 느낀다. 그러니 조건·배경 따위 신경 안 쓰고 맨몸으로 제대로 붙어볼 수 있는 링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코가 깨지고 목이 졸려 숨이 막혀도 온전히 내 몸뚱이와 패기만으로 싸워보고 버텨보고 그리고 이겨보고 싶은 거다. 아버지 잘 만나 대기업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친구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던 이 부장(유준상)이 링에 올라간 게 분명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별 세개 반(별 다섯개 만점) /변희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