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4.18 04:00

하동·구례 장터

섬진강 화개장터
13일 전남 구례장에서 탐방객들이 봄나물을 구경하고 있다. 파장이 가까워질수록 상인들의 목소리는 커지고, 손님들 발걸음도 바빠졌다. /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화개장터의 냇물은 길과 함께 흘러서 세 갈래로 나 있었다…경상 전라 양도의 경계를 그어주며 다시 남으로 남으로 흘러내리는 것이, 섬진강 본류였다.'(김동리 소설 '역마(驛馬)' 중)

국립중앙도서관과 교보문고, 조선일보가 공동주최하는 '길 위의 인문학' 올해 두 번째 주제는 '문학이 된 장날, 문화가 된 장날'. 탐방객 61명은 섬진강과 지리산이 빚어놓은 숱한 장관을 마주하며 섬진강~하동장~화개장터~쌍계사~사성암~구례장~화엄사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소설 '객주(客主)'의 작가 김주영이 강사를 맡았다. 마침 올해는 소설 '역마'를 쓴 김동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 행사가 진행된 12~13일 이틀간 탐방객들은 '역마'의 주인공 '성기'처럼, 사주에 역마살(驛馬煞)을 끼워 넣고 구례와 하동 곳곳을 방랑했다.

문학이 된 장날, 문화가 된 장날 일정
◇섬진강 줄기 따라 하동장·화개장터로

서울에서 버스로 다섯 시간을 달려 경남 하동군 섬진강 포구에 도착했을 때, 남도의 벚꽃은 이미 하직(下直)한 뒤였다. 떨어진 꽃잎은 도로변, 강물 위를 가릴 것 없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느린 강물이 부려놓은 삼각주(三角洲) 위에는 오리 떼가 조약돌처럼 박혀 반짝였다. 225㎞의 대장정을 마치고 바다로 흘러가는 이 강을 돌짐장수와 장돌뱅이, 보부상들이 드나들었다. 하동 포구는 상인 사회를 중심으로 조선 후기 사회변동을 그린 소설 '객주'에도 등장한다. '내로라하는 장돌림(장사꾼)들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은 하동 포구를 거친 경험이 있었으니(…) 취리에 밝고 물리만 익히면(…) 밑천을 잡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김주영 작가는 "서양에 광장이 있다면 우리에겐 장터가 있다"며 "장터에서 돈이며 유행이 가장 빨리 돌았고, 일제강점기 땐 독립운동도 먼저 일어났다"고 했다.

길 위의 인문학 탐방객
‘길 위의 인문학’ 탐방객들이 12일 경남 하동군 섬진강변에서 소설가 김주영의 강연을 듣고 있다.
섬진강변에서 읍내 쪽으로 길을 꺾어 10여분 걸어 들어가면 옛 '하동장'이 나온다. '하동군사(河東郡史)'에 따르면, 하동장은 1703년에 처음 섰다. 조선 말 전주장·김천장과 함께 영남의 3대 시장으로 꼽힐 정도로 컸지만 지금 하동장은 촌로(村老)들이 5일에 한 번 찾는 점포 48동의 소박한 공설시장으로 바뀌었다. 규모는 줄었지만, 시장 곳곳엔 돌미나리, 쑥부쟁이, 고들빼기 등 정겨운 나물 이름과 대구, 갈치, 오징어 등 남해의 익숙한 운율이 출렁였다. 김주영 작가는 하동장 길바닥에서 두릅 2만원어치를 샀다.

버스를 타고 하동장에서 화개면으로 20여분 달리면 '화개장터'다. 엿장수 가위질 소리, 뽕짝 노랫소리가 탐방객을 반겼다. 울외장아찌, 찐 문어, 섬진강 벚굴 등 먹을거리 풍성하고 골동품 장수, 허리띠 장수 등 별별 노점상이 자리를 틀고 앉아 봄 햇볕을 쬐고 있다. 장터 옆 화개천(花開川)엔 붉은 개복숭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탐방객들은 막걸리에 빙어튀김을 씹으며 대장간에서 칼 가는 소리를 듣거나, 조영남의 '화개장터'를 부르며 어깨춤을 췄다.

화개장터는 소설 '역마'의 주무대가 되는 곳. 장날이면 지리산 화전민, 전라도 황아장수(잡상인), 하동 해물장수가 모여 두메치곤 꽤 큰 장이 열렸다는 이곳에 청상과부 '옥화'의 주막이 있었다. 아들 성기와 단둘이 살던 이곳에 늙은 체장수 영감과 그의 딸 '계연'이 들러 소설은 무르익는다. 계연을 성기와 맺어주어 아들의 역마살을 잠재우려던 어미의 바람은 계연이 자신의 이복(異腹) 동생이라는 뜻밖의 사실에 처연해지고, 성기는 결국 엿판 하나 둘러메고 길을 떠난다. 성기가 떠돌이 운명을 받아들이는 순간 콧노래로 흘러나온 육자배기 가락. 주막 앞에 늘어섰을 능수버들 가지와 그 사이로 흘렀을 한(恨)을 떠올리며 탐방객들은 발길을 돌렸다.

◇취나물·돌미나리·고들빼기… 봄나물 천지

전남 구례 사성암
13일 전남 구례 사성암에서 내려다본 전경. 사성암은 네 명의 성인인 원효·도선·진각·의상 스님이 수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이경호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다음 행선지는 쌍계사. 절 초입, 당간지주(幢竿支柱)처럼 굵은 참나무엔 이미 손톱만 한 새싹이 움을 텄고 바위마다 연두색 덩굴이 부적(符籍) 문양을 만들어냈다. 이 절은 1000년이 넘는 역사와 더불어, 소설 속 성기가 동승질을 하던 곳이기도 하다. 인간계의 온갖 번뇌를 끊은 법당 안 십육 나한(羅漢)을 바라보며 한 탐방객은 "여기서 성기도 한평생 떠돌아야 하는 제 운명을 무던히 고심했을 것"이라 읊조렸다.

이튿날 아침 9시, 무대를 경남 하동에서 전남 구례로 옮겼다. 첫 목적지는 사성암(四聖庵). 직각으로 떨어지는 오산(鰲山) 벼랑 위에 자리 잡은 이 암자에 오르면 구례가 한눈에 들어온다. 탐방객들은 사성암으로 향하는 절벽·바위 틈에 동전을 끼워넣으며 소원을 빌었다. 오후 2시쯤 찾은 화엄사(華嚴寺)에서도 기도는 이어졌다. 종교를 초월해 각황전과 대웅전, 적멸보궁 앞에서 탐방객들은 두 손을 모았다.

구례장에서 비로소 봄의 활기는 절정을 맞았다. 취나물, 돌나물 따위를 펼쳐두고 상인들은 맨밥에 물 말고 된장을 찬 삼아 소박하게 식사했다. 다시 볼 기약 없지만, 그들은 "다음에 또 오시오"란 말을 잊지 않았다. 장날이라 광주에서 옷 팔러 나왔다는 강대봉(62)씨는 "어제는 남원, 내일은 곡성으로 간다" 했다. 장터에선 사람·물건뿐 아니라 언어도 섞인다. 김상진(66)씨는 "여기 있다 보면 하동이며 여수·남원 말씨, 그 중간 말씨 같기도 한 사투리도 들린다"고 했다. 김주영 작가는 "장터만 한 인문학이 없다"고 했다. "인간의 밥, 역사와 희로애락이 꿈틀거린다"고 했다. 탐방객들은 이 말에 화답하듯 "장터 사람들 표정이 밝고 건강해 좋다"면서 나물이며 생선으로 가득한 장바구니를 흔들어 보였다. 거기 지리산, 섬진강이 다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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