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가수 조영남이 말하는 '화개장터와 나의 삶'

"형, 큰일 났어요. 화개장터에 내려가야 하게 생겼어요. 신문 좀 봐요. 화개장터에 조영남이 있대, 조영남이."

가수 조영남(68)은 지난 20일 오전, 친한 후배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끊자마자 조영남은 신문을 펼쳐 기사를 찾았다. "세상에, 우리나라에도 이런 재미있는 일이 생기다니…." 기사는 조영남의 히트곡 '화개장터'의 배경이 된 경남 하동군 화개장터 바로 옆의 화개파출소장 이름이 '조영남'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4월 20일자 본지 B7면 보도〉

"전혀 몰랐어요. 말도 못하게 놀랐지. 이름이 조영남이라는 이유로 경찰서장이 '화개장터를 지켜라'면서 발령을 냈단 거잖아요. 이제 그 정도로 여유가 생긴 거예요, 우리나라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사잖아요? 이건 거의 창조경제의 경지라고 할 수 있다고 봐요."

서울 청담동 자택에서 23일 만난 조영남은 '경찰 조영남'의 존재를 알고 고무된 듯 보였다. 지면을 통해 조영남 화개파출소장이 전달한 "화개장터에 CCTV 하나 놔달라"는 요청도 즉각 수락했다. CCTV 한 대 가격은 약 500만원이다.

"내가 꼭 놔줄 거예요. 화개장터 사람들은 '조영남이 덕분에 먹고산다'고 한다지만 사실 내가 화개장터 노래로 먹고살았죠. 그럼, 그럼…. 이 집도 화개장터 노래해서 샀다고 봐야지." 한강과 영동대교가 내려다보이는 조영남의 약 620㎡짜리 청담동 아파트는 공시가격이 40억원이다.

"나는 26년 전 우연한 기회에 노래 '화개장터'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우연 덕분에 여기까지 왔죠. 이번엔 화개장터가 나에게 재미있는 인연을 가져다주었네요. '너훈하' '패튀김' '조영필'같이 모창 가수 있는 가수들이 부러웠는데…. 내겐 이제 그들에겐 없는 '또 다른 조영남'이 생겼지, 하하."

◇화개장터 노래 첫인상 "촌스러워 안 되겠다"

'화개장터'는 화가 겸 가수란 뜻으로 자신을 '화수(畵手)'라 부르는 조영남의 거의 유일한 히트곡이다. 그는 "삶의 밑바닥을 허우적대고 있을 때 그 노래가 세상에 나왔다"고 했다. 배우 윤여정과 이혼하고 서울 옥수동 사글셋방에 살던 1987년이었다. 조영남은 우중충한 열 평(약 33㎡)짜리 방에서 전직 기자였던 소설가 김한길(현재 민주통합당 소속 국회의원·민주당 당대표 후보)과 별 볼일 없이 시간 죽이며 같이 살았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한국 신문사에서 일하던 김한길은 조영남을 취재하다가 알게 됐고, 몇 년째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당시 김한길의 처지는 조영남과 비슷했다. "뭘 해야 할지 몰랐죠. 민심 다 돌아섰고, 가정에서도 버림받고, 매스컴도 떠났고, 돈도 없고…. 한심하고 비 오는 어느 날이었는데 한길이가 신문 쪼가리를 보여주더라고. 이런 걸 노래로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사회면 기사였다. '섬진강 주변 500여 가구 훈훈한 교류'라는 제목 아래 화개장터 소개가 담겨 있었다. 달리 할 일도 없어 배를 깔고 엎드려 있던 조영남이 '끙…' 일어나 앉았다. "맨들지(만들지), 뭐."

김한길은 가사를 끼적이고 그 옆에서 조영남이 기타를 치며 곡조를 붙였다. "내가 들어도 너무 유치하더라고. '딴따다안딴, 딴따다안딴' 하는 게 완전 '재건(再建) 노래'인 거야."

둘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야, 이거 너무 촌스러워. 안되겠다."(조영남) "형, 그럼 도대체 촌스럽지 않은 게 뭔데? 유치하지 않은 게 뭐냐고."(김한길) "히트곡이 되려면 사랑 노래를 해야지. 이건 완전 건전가요야." "그럼 사랑 노래도 하나 만들면 되잖아!" '김한길 작사, 조영남 작곡'이 한 곡 더 탄생했다. '한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에 너무 막막해…'라는 가사의 노래 '사랑 없인 못살아요'였다. 조영남은 "가사가 굉장히 독특한 게 '화개장터'보다 훨씬 멋있더라"고 했다.

조영남은 '사랑 없인 못살아요'에 큰 기대를 품고 음반 '한강'을 1988년 발표했다. '화개장터'는 뺄까 하다가 곡이 조금 모자란다고 해서 그냥 넣었다.

예상은 완전히 깨졌다. 다른 노래는 큰 반응이 없었고 화개장터만 '대박'이 났다. 방송국에서 다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무대에 서는 횟수가 빠르게 잦아졌다. "내가 얕보는 노래가 성공하는 경우가 많아요. 송창식 '왜 불러, 왜 불러' 하는 노래 있잖아. 내가 듣고 하도 우스워서 되게 유치하다고 그랬거든. 에휴, 뭘 모르고 잘난 척한 거지."

◇"김한길 소설 '담박질', 내 이야기다"

조영남은 5월 4일 있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김한길 의원이 당대표에 오르기를 바라고 있다. "김한길이 궁해지면 '화개장터'에 대한 저작권료를 달라고 할 거 아냐. 무조건 잘돼야 해요. 그런데 나도 할 말이 있지. 나도 내가 쓴 소설을 김한길 이름으로 발표한 적이 있거든."

조영남의 설명은 이렇다. 화개장터가 탄생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김한길에게 원고를 청탁하는 전화가 걸려온다. 김한길은 "지금 쓸 만한 상황이 아니다"라며 거절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조영남이 "야, 인마. 글이나 쓰지 왜 그걸 거절해"라며 핀잔을 주자 김한길이 "형이나 써"라고 받아친다.

소설은 쓸 줄 모른다는 조영남에게 김한길은 3일 동안 간단한 작법(作法)을 가르쳐주고 소설 세 개를 우선 읽을 것을 명한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알베르 카뮈의 '객'이었다.

조영남은 "김한길에게 교육을 받고 보름에 걸쳐 원고지 70장짜리 단편소설 '담박질'('달음박질'의 줄임말)을 썼다. 김한길이 한 번 손을 본 다음에 '문학사상' 1987년 10월호에 발표했다"고 했다. 조영남이 초등학교 때부터 우러러보던 한 선배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었다. 등장인물 이름도 실명이고, 내용도 실화였다.

이에 대해 김한길 의원 측은 "조영남씨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적어서 주었다. 그걸 가공해 문예지에 발표한 것"이라고 했다. '공동 집필' 수준은 된다는 뜻이다. 조영남은 김한길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한길아. 어쨌거나 그때 원고료 나한텐 한 푼도 안 나눠줬지? 화개장터 가사 저작권료 얘기 인제 그만해라. 소설 원고료랑 퉁 치는 거다. 오케이?"

◇"소박한 옛 화개장터가 좋더라"

'화개장터' 덕에 조영남은 전국을 뛰었고 세계 곳곳의 무대에 섰다. 로스앤젤레스(LA) 폭동 후에 열린 1991년 LA 공연에선 인종 갈등을 안타까워하는 노래로 해석돼 관중의 공감을 얻어냈다.

역시 민족 간 분쟁이 잦은 러시아의 무대에도 '화개장터'가 올랐다. 2004년 크렘린궁에서 공연할 땐 제목을 '화개 바자르'로 고치고 '프리호지테 이 우비지테(구경 와보세요)'라면서 러시아어로 노래를 불렀다. 러시아인 관객들이 무대까지 뛰어올라 와 즐거워했다.

1996년엔 김대중 전 대통령(당시 국민회의 총재)과 함께 화개장터 무대에 섰다. 김 전 대통령은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따라 불렀다. "그때는 '화개장터'가 '강남스타일' 못지않았다니까. 한 소절 부르면 관중이 일제히, 무조건, 입맞춰 따라 부르는 거지."

조영남은 지금까지 화개장터에 세 번 갔다. 노래 발표하고 1년쯤 지나 한 방송국과 처음 가본 화개장터는 천막 몇 개가 고작이었다. 그는 "어떤 장터인 줄도 모르고 노래를 발표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웠다"고 했다.

두 번째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한 공연이었다. 2000년 화개청년회가 '화개장터 노래비'를 세울 때 잠깐 들른 것이 세 번째다. 장터는 완전히 관광지로 바뀌어 있었다. "노래가 세상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겠나 싶더라고요. 그런데 난 어쩐지 예전의 소박한 화개장터가 더 좋더라고."

◇"세상 뜬 친구들아, 요런 재미 모를 거다"

가수 조영남은 노래 '화개장터'에서 그의 마지막 날을 종종 연상한다. 가수장(葬)을 지내면 세상을 뜬 가수의 최대 히트곡을 다 함께 합창하는 관례가 있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황금심 장례식에서는 '우울고 와아아았다 울고 가아아는' 하면서 '알뜰한 당신'을 합창했고 고운봉 때는 '울려고 내가 왔던가('선창'가사)'였어요. 내 장례식 생각하니까 안 되겠는 거야.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이라면서 손뼉 짝짝 치고 마지막에는 '구우우경 한번! 와아아 보세요!…없을 건 없답니다!' 하면서 신나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장례식 때는 이걸 불러라'라면서 만든 노래가 '모란동백'인데…. 후배들이 웃기지 말라고 그러더라고. 죽은 다음인데 우리가 뭘 하든 어떻게 말릴 거냐고, 하하."

경찰 조영남과 조우하며 그는 세상을 먼저 뜬 또래 친구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김점선(화가), 최윤희(방송인), 장영희(수필가), 이윤기(소설가), 그리고 두 달 전 떠난 서양화가 이두식…. 조영남은 "지금도 전화하면 걔들이 올 것만 같고, 그래서 전화번호는 하나도 안 지웠다"고 했다.

"난 '조영남 화개파출소장'이라는 존재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죽은 친구들보다 안 죽은 내가 조금 나은 것은 이런 '잔재미 몇 번 더'가 아닐까, 삶과 죽음은 딱 이 정도의 차이가 아닐까…그런 생각이 들어요. 살아 있다고 해서 엄청난 행복이 밀려들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몇 번 더 웃고 잔잔히 놀라는 것 아니겠어요? 먼저 떠난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어요. '너희는 요런 재미 이제 없지? 그러니까 일찍 죽은 너희가 손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