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 너무 많이 먹어서 수명이 늘어났을 거예요"

"평생 웃게 해주겠다"고 철썩같이 약속했던 강지원(64) 변호사는 최근까지도 아내 김영란(57) 전 대법관의 속을 끓였다. 무소속으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하겠다는 걸 말리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남편의 신념이 너무 확고했다. 그로 인해 국민권익위원장 임기(3년)를 1년 넘게 남기고 물러난 김 전 대법관은 "남편을 원망하진 않는다"고 했다. "정권 바뀌면 어차피 물러나려고 했어요. 함께 열심히 일해온 직원들에겐 정말 미안했지만요." 선거자금으로 10억여원을 까먹고 돌아온 강 변호사와 '한판' 하셨느냐 묻자, "비싼 사교육비 낸 셈 쳤다"며 웃었다. "'정책선거'를 위한 시스템을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 모두 배우게 됐으니까요."

국민권익위원장직을 내려놓고 올 3월부터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석좌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는 김영란 전 대법관이 다시 이슈의 중심에 섰다. 일명 '김영란법'으로 불리는 '부정청탁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을 국민권익위원회(이성보 위원장)가 올 상반기 중 입법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히 표명하면서다. 마침 법 제정을 주도한 김영란 전 대법관이 '김영란법'이 공직사회의 벽에 막혀 시동조차 걸지 못한 뒷이야기를 비롯해 30년 동안 법관으로 살면서 목격한 한국 사회의 부패패러독스에 대한 자신의 육성을 담아 책으로 냈다. '이제는 누군가 해야 할 이야기'(쌤앤파커스)라는, 다소 센세이셔널한 제목으로, 벌써부터 법조계와 공직사회를 긴장시키고 있다.

'왜 이 시점이냐'는 질문에 김 전 대법관은 "일부러 시기를 맞춘 것은 아니다"고 했다. "사표수리가 늦어지면서 공백 기간이 생겼는데, 그냥 월급을 받기 죄송해 1년11개월 남짓 권익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보고 배운 것들을 정리해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김영란법'의 출발은 우리 사회 고질적인 연줄문화, 청탁문화였다. "청문회 때면 다운계약서, 위장전입, 논문표절 같은 문제들이 반복되어 나오는데 그런 것을 걸러낼 시스템이 절실하죠. 권익위에 와서 권력형 부패를 근본적으로 막을 방법은 뭘까 생각해보니 그게 바로 연줄과 청탁문화를 없애는 거였어요. 청탁을 거절할 근거, 매뉴얼, 행동강령을 구체적으로 공무원들에게 제시하는 거죠. 단지 부패를 단속하는 게 아니라 삶의 방식, 문화를 바꾸겠다는 것이 법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법안은 초반부터 공직사회의 벽에 부닥쳤다. 대가성이 없는 돈을 직무와 관련 없이 받더라도 형사처벌을 받고, 금품을 요구하거나 주겠다고 약속만 해도 처벌되는 엄격한 조항이 담겼기 때문이다. "욕을 너무 많이 먹어 수명이 늘어났을 거예요(웃음). 전 국민을 범죄화하는 법이라는 비난도 들었지요. 그래서 법무부에도 적극적인 검토를 부탁했던 것인데, 지금까지도 진척이 없네요. 입법 그 자체를 반대하는 것도 같고."

'법이 아무리 좋아도 피해갈 사람은 다 피해가지 않느냐'고 묻자 김 전 대법관이 반문했다. "그렇다고 안 만드나요? 월드뱅크는 뇌물 주다 걸린 기업들의 명단을 홈페이지에 공개하고 일정 기간 그 기업에 투자를 제한합니다. 부패가 경제적 손실로 이어지는 시대가 올 거예요."

김영란 전 대법관은 매주 두 번 대학강단에 서는 생활이 즐겁다고 했다. 그는 '딸깍발이'로 불린 조무제 대법관 이후 로펌이 아니라 대학으로 간 대법관으로 화제를 모았었다. "전원합의체 판결문 11편을 교재 삼아 학생들과 한 편씩 읽어내려가면서 논쟁이 됐던 부분, 판결에 적용된 법률이론 등을 설명하고 토론합니다."

국무총리, 헌법재판소장으로 끊임없이 하마평에 올랐던 그에게 '정치에 뜻이 없냐'고 물었다. "내겐 정치적 식견이 없어요. 혼자서 책 읽고 여행하는 호젓한 삶이 좋아요. 로펌에 가지 않은 건 대법관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거액의 돈을 받은 만큼 내 시간을 쏟아붓는 게 싫어서이기도 했어요. 공무원 아버지 때문에 문학에서 법학으로 진로를 바꿔 지금까지 살아왔으면 됐죠. 이제는 제 마음대로 살아보고 싶어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