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대사관·낡은 노래방… 젊은 예술의 '아지트'가 되다

2004년 한남동에 삼성미술관리움이 개관했을 때만 해도 "우범 지역에 비(非)문화적인 이태원에 미술관이라니 이색적"이란 인식이 강했다. 그러나 요즘 이태원은 30~40대 미술인 사이에서 가장 '핫(hot)'한 장소로 손꼽힌다.

정재호(43) 갤러리2 대표는 최근 청담동 화랑 문을 닫고 한남동, 동빙고동, 이태원동 등 범(汎)이태원 일대에 공간을 물색 중이다. 동갑내기 큐레이터 이승민(39)·정혜연씨는 지난해 12월 서울 동빙고동 전(前) 오만 대사관 건물 지하 1층에 '갤러리 101'을 열었다.

◇월세 싸고 강남·북 중간이라 유리

이태원의 가장 큰 이점은 싼 임차료. '갤러리 101'은 38평(125㎡) 공간이 보증금 1억원, 월세 200만원. 같은 규모 청담동의 3분의 2 수준이다. 청담동 상가는 관리비가 임차료와 맞먹지만, 이태원은 관리비 부담도 거의 없다. 개관 4개월째인 현재 성과는 만족스럽다. 정혜연 대표는 "처음엔 어색해하던 고객들도 이젠 호젓하고 주차공간이 넓어 좋다고 한다"고 했다.

강남과 강북 중간이라는 지리적 이점도 화랑주들에겐 큰 매력. 정재호 갤러리2 대표는 "큰 손님은 강북에, 소소한 작품을 사는 손님은 강남에 많다. 이태원은 강남·강북 거주자 모두에게 '심리적 임계점'이라 손님 끌기에 좋다"고 말했다.

◇'낡음'과 다문화 에너지가 매력

'자연스러운 낡음'이 깃든 동네 분위기, 다양한 인종이 몰리는 코스모폴리탄 문화도 최첨단 '컨템퍼러리 미술'과 어우러지기에 적합하다는 평이다. 50~70대 화랑주들이 질색하는 '낡고 퀴퀴한 지하실'이 해외 경험 많은 30~40대에겐 오히려 매혹적으로 느껴진다. 2009년 한남동 다세대 건물 지하 1층에 '류화랑'을 연 류상엽(35)씨는 "뉴욕 소호나 첼시 화랑도 이태원처럼 값싼 지하 공간에서 시작됐다"고 했다.

여러 업종이 건물을 나눠 쓰는 공간이 더 인기다. '갤러리 101'은 옷가게, 미용실과 한 건물을 쓰고, 지난해 6월 이태원 경리단길 시장골목에 문을 연 대안 공간 '윌링&딜링'은 지하 노래방을 개조했다. 김인선(42) '윌링&딜링' 디렉터는 "재래식 문화가 살아있는 시장통이 오히려 재밌다. 특별한 감성이 있는 마니아층 관객이 단골손님"이라고 했다.

◇'날것의 멋' 탐낸 기업미술관도 가세

'젊은 미술'이 주머니 형편 때문에 선택한 이태원 일대는 '영세한 자본'이 꾸려가는 '날것'의 분위기 덕에 멋스러워졌다. 그러자 '날것의 멋'을 탐낸 대기업 미술관도 이태원에 입성했다. 지난해 11월 한남동의 낡은 당구장에 문을 연 '구슬모아 당구장'. '인디' 미술관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대림미술관이 운영하는 전시공간이다.

'구슬모아 당구장'은 자본력을 과시하는 기존 기업미술관과는 동떨어진 시도다. 이준용 대림산업 명예회장의 장남인 대림미술관 이해욱(45) 관장이 "기존 미술관 전시장의 틀을 깬 창의적인 공간을 찾겠다"며 마련했다. 미국 컬럼비아대 유학파인 이 관장은 맨해튼 뒷골목처럼 허름하면서 사람 사는 냄새 나는 한남동 골목에 흥미를 느꼈다는 후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