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웅 기자의 북앤수다] 난 '돈 이야기'에 집착한다, 그게 뭐 잘못됐나

영화 '고령화 가족'의 개봉(9일) 소식을 듣고 원작을 쓴 작가 천명관(49)의 감회가 궁금했다. 영화의 원작소설을 쓴 작가는 많지만 이 경우는 조금 다르다. 비정하게 말하면 그는 실패한 '영화 인생'이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충무로에 30대의 10년을 바쳤지만 '영화인 천명관'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그나마 10편 훌쩍 넘는 시나리오 중 '총잡이' '북경반점' 등 몇 편이 스크린에 옮겨져 '시나리오 작가' 크레디트만 남았을 뿐이다.

마흔이 되던 2003년 그는 다른 삶의 궤도에 올라탔다. 단편소설 '프랭크와 나'로 '문학동네 신인상'을 받았고, 40대의 10년 동안 쓴 장편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리'를 통해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 중 한 명으로 인정받게 된다. 작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좋아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그는 처음에는 자제했고, 중반에는 격렬하게 솔직했다가 마지막에는 유머를 되찾았다.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작가의 소설은 영화가 됐다. 소회는.

"떠난 지 10년 됐잖나. 다 잊었다. 그때는 30대고, 지금은 곧 50이다. 진짜 담담하다."

―의도적인 '담담' 아닌가.

"전혀. 영화도 잘해줬으면 좋겠다, 뭐 그런 정도다."

그는 고졸(高卒)이다. 20대의 10년은 골프용품점과 보험회사에 다녔고, 30대는 영화판에서, 40대는 소설가로 살았다.

―10년씩 다른 인생을 살았다.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의자를 당겨 앉은 뒤) 나도 그런 질문을 내게 한다. 모르겠다. 진짜로. 사람들은 영화 만드는 일과 소설 쓰는 일이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창작을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내게는 전혀 다른 일이다."

―둘 다 예술의 영역 아닌가.

"내가 전에 영업을 했지 않나. 보험 팔고, 골프채 팔고. 내게 영화는 그 연장이었다. 돈 버는 일이었다고. 나는 영화 할 때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경멸했다. 저건 아마추어가 하는 짓이라고. 내게 영화는 '쇼비즈니스'였다. 그걸로 돈을 버는 일이다. 그런데 소설은 완전히 다르더라고."

―구체적으로.

"영화는 여럿이 만든다. 하지만 소설은 온전히 혼자만의 작업. 사람들은 '영화=감독'이라 생각하지는 않아. 근데 소설은 100% 그 사람이더라. 내가 남들보다 더 깨달은 바가 있다거나 예술적이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어색하고 힘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양아치'같이 행동한 적도 있다."

'양아치'라는 '위악'도 그래서 나온 표현. 그는 미국 여성 작가 조이스 캐럴 오츠(75)의 책 '작가의 신념'(The Faith of a Writer: Life, Craft, Art)을 인용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의 오츠는 자신의 가족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했던 인물. 그는 '예술에 기술이 없으면 개인적 행위일 뿐'이라는 오츠에게 동의하면서 "나는 기술에 더 관심이 많다"고 했다. 물론 그의 '문학=예술'에는 존경과 냉소가 반반씩이다. 작가가 된 뒤에도 그는 심사, 강사, 표사(표4·책 뒤표지에 쓰는 추천사)를 하지 않는다. 자칭 '삼무사'다.

―삼무사?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싶지 않다. 소설도 물론 영향을 미치겠지만 아주 완곡하고 느린 방식 아닌가. 책 뒤표지는 원래 저널의 평가가 들어가는 자리다. 강연 역시 기본적으로 자기 인생 팔아먹는 일이다. 상상력이 고갈된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나는 아직 팔아먹을 상상력이 있지 않나. 아, 내가 또 너무 나갔군(웃음)."

그는 "소설가가 보험 외판원보다 더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단언한 적이 있다. 영업을 예찬하던 그의 20대 이력과 포개지는 단호한 세계관이다.

―대학은 왜 안 갔나.

"공부를 못했다. 고교 때 반 58명 중 58등이었다. (재수는 왜 안 했나?) 세상을 몰랐지. 부모는 물론 내게 그런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때는 다 그랬다. 알아서 크는 거. 집에 안 들어가도 궁금해하지 않았고. '근대화'가 덜 됐던 거지(웃음)."

―대학 안 간 것을 후회한 적은.

"평생, 평생. 내 인생 가장 큰 후회다. 항상 주눅 들고 눈치 보고 의식하고. 에너지가 너무 낭비된다. 내가 이 자리 올 때까지 뭔 일이 없었겠나."

―'고졸 인생 역전'으로 추앙받지 않나?

"영업할 때는 몰랐다. 다들 주변이 비슷했고 또 나도 재미있었으니까. 그런데 영화판 들어오니까 학벌이 장난 아니더라고. 나이 서른에 영화사에 들어갔는데 서울대가 3명, 연·고대가 2명씩 그리고 한양대였다. 나이 먹었다고 내게 총무과장 직함을 줬는데 말이 과장이지 '시다바리'였다. 기획실 여직원이 고대 나온 동갑내기에게는 '형'이라고 부르는데 나한테는 '천 과장님'이라 부르더라고. 나도 형이고 싶은데 말이다(웃음). 문단에 들어오니 이건 또 뭐지? 한 술 더 뜨더라고. 아무래도 나는 이 동네 저 동네 유랑할 팔자인가보다. 사실 지금도 '이제 어디론가 떠날 때가 된 것 아닌가'기분 들 때가 있다."

'정말 좋아하는 일은 직업으로 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다시 한 번, 잘할 수 있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의 간극. '만약 직접 연출했으면 어땠을까'라는 어깃장 질문을 던져봤다. "안 하길 잘했지. 했으면 충무로 다 죽었어. 하하."

현실에서는 얼마 있는지도 모르고 지갑부터 열고 보는 무대책 인생이지만 천명관의 문학관은 '돈으로 인해 벌어지지 않는 일에는 관심 없다'는 것. 그는 '예술가'의 흔한 '포즈'조차 없는 능란한 이야기꾼이다. 인터뷰 말미, 그는 한국 문학에 너무 무례했던 것 같다며 뒤늦게 무안해했다. 하지만 그 '무례' 덕분에 한국 문학은 찐득한 삶을 생생하게 풀어내는 이야기꾼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