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천안 용암리엔 20년째 머슴이 산다?

"그분은 3년 전에 83세로 돌아가신 이호순 할머니세요. 늘 어머니 같으셨죠. 우리 아이들도 많이 봐 주시고, 같이 밭도 매주시고. 그 옆 분은 이숙희(91) 할머니. 동네에서 제일 지대가 높은 집이라 별명이 '꼭대기 할머니'예요. 4년 전 예배당에 창문을 짜 넣을 때 갑자기 헌금을 내놓으셨죠. 공공근로로 받은 품삯을 내놓으신 거예요.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한옥 예배당 한지 창문으로 햇빛이 은은하게 비쳤다. 흰 린넨 커튼 위에 색테이프로 붙여 놓은 오래된 사진들을 가리키며 교인들에 대해 말할 때, 정훈영(48) 목사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렸다.

충남 천안시 외곽의 평범한 농촌마을 북면 용암리, 가을산 단풍처럼 알록달록 색 기와를 얹은 2층짜리 한옥 교회가 한 채 서 있다. 20년 전 이 마을에 들어온 '단비교회'다.

◇마음을 갈듯 밭을 갈며 20년

정 목사는 교회가 있는 용암2리에서 차로 10분 거리의 상동리 출신이다. 20년 전인 1992년 감리교신학대를 졸업한 뒤 농촌 목회를 해보겠다며 이 마을로 내려왔다. 청장년들은 떠나고, 노인들만 남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소 외양간 하나를 빌려 고쳐 살면서 '동네 머슴'을 자청했다. "농기계 하나를 장만했어요. 마을에 유일한 젊은이 일꾼이니,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어르신들 밭을 갈아드리다 날이 샜죠."

갑자기 동네에 나타난 낯선 이를 경계하던 노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었다. 노인들은 "젊은 사람이 그렇게 동네일을 도와주고 품삯도 안 받는데 교회라도 나가야겠다"며 신앙생활을 시작한 이도 많았다. 1~2인 가구가 대부분인 이 마을 50여 가구 중에서, 지금은 30명 넘는 사람들이 꼬박꼬박 주일 예배에 참석한다.

◇유기농 작목반 이끌어

마을 노인들은 "어차피 우린 힘에 부쳐 다 못 짓는다"며 정 목사에게 쪽논을 내줬다. 정 목사는 당시 개념조차 생소했던 유기농업을 시작했다. 비료 대신 지력(地力)을 키우는 미생물을 쓰고 살충제 대신 현미식초를 뿌리며 잡초와의 전쟁을 벌였다. 처음 유기농 논농사를 지은 1994년, 정 목사 논은 첫 해 농사가 여느 집 못지 않게 잘 됐다. 지금은 '북면 유기농 작목반'에 정 목사를 포함한 10가구가 참여해 유기농 벼는 물론 배추, 상추, 오이, 고추를 키우고 있다.

◇한옥 예배당은 10년째 짓는 중

2000년, 정 목사는 한옥 예배당을 직접 짓기 시작했다. 설계와 주춧돌 놓기부터 시작해 대들보, 서까래, 마루, 문짝까지 직접 배우며 만들고, 기와 하나하나 직접 페인트로 칠해 얹은 지 10년째다.

알음알음 이 교회 이야기가 밖으로 알려지면서, 서울 서초동 사랑의교회 청년들은 20년째 매달 두 번 20여명이 농사일과 건축을 도우러 온다. 정동제일교회, 용산 청파교회 등 서울의 큰 교회들도 이 교회의 농산물 구매자이자 후원자가 됐다.

비 오는 날, 130㎡(40평)쯤 되는 예배당은 마을 할머니들 수다방으로 바뀐다. 교인들이 가난하듯 교회도 가난하니 시샘하고 싸울 일도 없다. 정 목사는 최근 20년 농촌 목회 경험을 '단비교회 이야기'(꽃자리)로 펴냈다.

정 목사에겐 꿈이 있다. "지역과 도시 아이들을 위한 자연체험학교, 노환으로 움직이기 힘든 마을 어르신들을 위한 쉼터를 만들어 보려고요. 어르신과 아이들이 한 마당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