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출장길… 30년 동행한 '또 하나의 반려자'

오래 말린 땔나무, 농익은 포도주, 믿을 수 있는 옛 친구, 그리고 읽을 만한 원로 작가의 글.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꼽은 '오래 묵을수록 좋은 것' 네 가지 목록이다.

내게 그 목록을 꼽으라면 베이컨의 네 가지에다 30년째 들고 다니는 낡은 갈색 서류 가방을 추가하고 싶다.

이 가방과 맺은 인연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대건설에 근무하던 시절 하루가 멀다고 돌아오는 해외 출장길을 아내가 사준 가방에 짐을 챙겨 오르곤 했다. 볼품없는 합성가죽 가방이었지만 다들 없이 살던 시절이라 그다지 흉 될 게 없었다.

출장지로 향할 때는 홀쭉했던 가방도 귀국길에는 항상 빵빵했다. 현지에서 구한 자료와 책들, 검토할 서류들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억지로 지퍼를 올려야 잠가지곤 해 언제나 아슬아슬했다. 급기야 1983년 싱가포르 출장길에서 탈이 났다. 이것저것 자료를 꾸역꾸역 쑤셔 넣다 보니 부피를 견디지 못하고 지퍼가 망가졌다. 급한 김에 창이공항 면세점에서 갈색 가죽 가방 하나를 골랐다. 지금은 브랜드도 지워져 어떤 브랜드였는지 알 길이 없지만, 당시 가격이 만만치 않아 살까 말까 한참 망설이다 큰마음을 먹고 샀던 기억이 난다.

이 갈색 가방은 서류 가방이라고 하기엔 좀 크고, 여행 가방으로 부르기엔 작다. 그래도 보기보다 속이 넓어 물건을 많이 집어넣을 수 있다. 쓰임새는 다양했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옷가지 몇 점만 챙겨 넣으면 여행 가방으로도 손색없었고, 남은 공간에 책이나 자료를 밀어 넣어도 공간이 비좁지 않았다. 그 뒤론 바쁜 출장길을 동행하는 ‘반려자’ 역할을 해줬던 게 이 갈색 가방이었다.

11년 넘는 해외 현장 생활 도중 오랜만에 고국 방문길에 오를 때 이 가방에는 어린 두 딸에게 줄 선물이 들어 있었고, 다시 현장으로 돌아올 때 가방 한 귀퉁이에는 아내가 정성껏 챙겨준 마른반찬들이 들어 있었다. 현대건설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경복대학 토목설계과 초빙교수로 매주 월·수요일 오후 상하수도 공학을 강의하러 출강할 때는 이 가방이 책 보따리가 되어주었다. 경복대 야간반에는 낮에 일하고 밤에 시간을 쪼개 공부하는 만학도(晩學徒)가 많았다. 이들을 위해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려 자료를 만들고 복사해 가방에 넣어 갈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일하던 2003년 10월 2일 당시 환율 기준으로 1조2000억원에 달하는 이라크 공사 미수금을 받아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뉴욕행 비행기에 올랐다. 무릎 위에 이 가방이 올려져 있었음은 당연했다. 가방 안에는 공사계약서에서부터 이라크 측과 공사를 진행하며 주고받은 손때 묻은 자료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다행히 몇 달 후 미수금을 받아냈고 그 돈이 현대건설 회생의 불씨가 되어 주었다. 결정적인 그 순간 이 가방은 항상 내 곁을 지켰다.

현대건설을 떠나 경복대 총장으로 재임하다 2009년 8월 26일 주택공사와 토지공사를 합친 통합공기업 LH 초대 사장으로 임명됐다. 막중한 임무를 부여안고 첫 출근을 하던 날 어김없이 내 손에는 이 가방이 들려 있었다. LH 사장으로 취임하고 난 뒤에는 보통 주말에 중요한 보고서나 서류 뭉치들로 가방을 잔뜩 채워 집으로 가져갔다. 차분히 앉아 검토해야 하거나 긴요한 판단을 요하는 사안들이 대부분이었다. 가방이 무거울수록 현안이 많은 것이다. 회사일이든, 개인적인 일이든 가방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담겨 있었으니 가방의 무게는 곧 내 책임감의 무게였다.

그 무게가 반드시 서류의 두께와 비례하지는 않는다. LH 사장 취임 후 줄곧 가방에 넣고 다니던 현대엔지니어링 스톡옵션이 그랬다. 종이 한 장에 불과했지만 무게는 천근만근이었다. 스톡옵션은 현대건설 사장 재임 시 회사 정상화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경영 정상화는 나 혼자 이룬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직원들을 위해 반납하고 나니 가방의 무게도 마음도 홀가분했다.

손잡이가 낡아 몇 차례 수선도 하고 표면에는 내 피부의 주름살만큼이나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다. 가방을 꾸려주는 아내는 “웬만하면 새것으로 바꾸라”고 잔소리다. 일리 있는 권유이지만 영 내키진 않는다. 30년 동안 허물없는 친구처럼 지낸 사이인데 나이 좀 먹었다고 한순간에 내친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비록 물건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온전히 지켜봐 주었다는 사실만으로 큰 의지가 된다.

타국 낯선 공항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고 30년을 같이 지내면서 이제 내 인생 마지막 보직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도 이 가방은 내 곁을 지키고 있고 또 함께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LH를 떠나면서 언제나 그랬듯 남겨둔 미제(未濟)나 미련이 단 한 점도 남지 않도록 가방을 홀쭉하게 비워 놓고 가려 한다. 낡은 갈색 가방 역시 새털처럼 가벼운 몸으로 떠나길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