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신영 기자의 별★ 사람] 서울 소공동 지하상가 '로렉사 '주인 김주복씨

괘종시계 네 개와 손목시계 수십 개가 벽에 걸린 서울 소공동 지하상가의 시계 수리점 '로렉사'. '49년 경력'이라는 빨간 표지가 손님을 맞는다. 조막만 한 가게의 유리벽 너머, 나이 지긋한 가게 주인이 확대경을 쓰고 골똘히 시계를 고친다.

소공동 일대를 지나는 이들에게 익숙한 이 풍경에 지난 3월, 변화가 생겼다. 홀로 앉아 시계를 만지던 로렉사 주인 김주복(67)씨 곁에 조수(助手)가 생긴 것이다. 젊고 호리호리한 이 남성은 손님이 오면 조용히 밖으로 나가 기다린다. 면적이 한 평(3.3㎡) 정도인 가게는 두 명이 들어가기에도 비좁다.

"쟤요? 우리 아들 녀석이에요. 아이고, 저 녀석이 디자인인가를 배워서 중국서 일을 한다고 하더니 돌아왔지 뭐야. 시계 고치는 걸 가르쳐달라고 말이에요. 하하하." 묻지도 않은 손님에게 조수의 정체를 설명하는 주복씨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지난 14일 가게에서 만난 김씨는 "시계에 관심이 없던 아들이 얼마 전 드디어 마음을 바꿨다. 일을 아주 빨리 잘 배운다"고 말했다. 아들 형욱(36)씨는 두 달 전부터 시계 수리 학원과 아버지의 가게를 오가며 기술을 배우고 있다. 아버지의 아들 자랑이 부끄러운지 형욱씨의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아빠도 참…. 나이가 드셔서 점점 여성스러워지시는 것 같아요."

드디어 제자를 얻다

아버지 일에 무심했던 아들, 중국서 직장 다니다 문득 "아빠, 나 시계 배워볼까"

◇떼써서 배운 기술, 밥벌이가 되다

주복씨는 열일곱 살이었던 1963년, 친척 아저씨 가게에서 일하며 용돈 벌이를 하다가 시계 수리의 세계에 빠졌다. 시계방과 마을금고를 겸하는 경기도 연천의 자그마한 점포였다. 주복씨는 금고의 수금(收金) 담당이었지만, 관심은 온통 가게 한쪽의 시계 수리공에게 쏠려 있었다. "찰칵, 찰칵 하며 움직이는 시계의 반짝이는 '내장'이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완전히 반해버렸죠."

1년 동안 바닥을 닦고 시계를 광(光)내며 시계 수리공에게 떼를 쓴 끝에 배우게 된 시계 수리 기술은 주복씨의 평생 밥벌이가 됐다. 그는 서울 남대문 상가, 충무로 세종호텔을 거쳐 소공동 지하상가에 자리를 잡았다. 시계를 고쳐 번 돈으로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낳아 길렀다. 2000년엔 서울 수유동에 방 세 개짜리 '내 집'도 마련했다. 주복씨는 "한창때였던 1990년대엔 매월 1000만원어치씩 수리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주복씨는 집에선 일 얘기를 거의 안 했다. 때때로 큰아들인 형욱씨에게 "가게 물려받을래?"라고 물어도 답이 돌아오질 않았다. 형욱씨는 "어린 시절 내 꿈은 반듯한 샐러리맨이었다. 아빠 하는 일이 싫었던 건 아닌데, 내가 그린 미래와 너무 멀어서 아빠의 제안을 흘려들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녀석아, 10년은 배워야 해

오전엔 학원서 기초 배우고 오후엔 현장서 도제식 수업, 영어도 익혀야 하고…

◇서른여섯에 처음 본 아빠의 세상

형욱씨는 대학에서 토목을 전공했다. 졸업 후엔 한 중소 건설사에 입사했다. 현장 관리직이라는 일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매일같이 반복되는 격한 술자리가 고단했고 사장과 하도급업체 사이의 결탁 같은 중소 건설사 특유의 야합 문화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2년 만에 사표를 냈다.

다른 일을 찾던 형욱씨는 백수 생활을 하다가 친척이 하는 디자인 학원에 등록했다. 두 번째 직장은 학원에서 배운 지식을 토대로 들어간, 액세서리를 만드는 한 중소기업이었다. 한 달 월급이 70만원 정도로 적은 대신 중국에서 일할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넓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던 형욱씨는 중국의 액세서리 공장에 가서 관리직으로 6년을 일했다. "재미도 있었지만 선적(船積) 일정을 맞추려면 밤이고 주말이고 일해야 해서 힘들었어요. 격무에 비해 월급은 너무 적었고요. 어느 날 문득 '이렇게 평생 살 순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올해 초 형욱씨가 귀국하고 싶다고 전화하자 아버지는 어릴 때부터 때때로 말해온, 오랜 제안을 또 던졌다. "시계 수리 기술을 배워라. 내 가게와 단골은 엄청난 자산이고 탐내는 사람도 많은데, 그걸 너에게 줄게. 눈 잘 보이고 손 안 떨리면 평생 할 수 있는 일이다." 형욱씨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뒤돌아 생각하니 아버지가 일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에서 '시계 수리'를 검색했다. 일본 NHK의 다큐멘터리 '독립시계사들의 소우주'를 내려받아서 봤다. 아버지의 업(業)을 물려받겠다는 한 스위스 여성이 하는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시계 장인(匠人)은 죽은 기계에 생명을 불어넣는 사람이다."

형욱씨는 "처음으로 시계의 세상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가 평생 그런 일을 했구나' 싶더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에 전화를 걸었다. "아빠, 시계 고치는 거 한번 배워볼까 싶은데요…." 수화기 너머 아버지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럴래? 정말 그래 볼래?"

네트워크를 물려받아라

시계 문자판 그리는 사람… 유리 깎고, 광 내는 사람… 각 분야 장인도 알아야

◇"녀석아! 내가 10년은 더 할 수 있다"

지난 3월 귀국한 형욱씨에게 아버지는 시계 수리 학원에 등록하라고 권했다. 아버지의 일대일 교육을 기대했던 형욱씨는 의아했다. 아버지 주복씨는 "대학교수가 유치원생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학원에서 탄탄하게 차근차근 기초를 배우고, 학원 끝나고 나서 나에게 현장 교육을 받으면 된다"고 말했다.

형욱씨는 매일 오후 4시쯤 학원을 마치면 '로렉사'로 와서 아버지에게 도제식 교육을 받는다. 그는 "학원에 다니기 전까지 아빠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몰랐다"고 말했다. "태엽 감는 시계의 '심장' 격인, 유사(遊絲)라는 부품이 있어요. 아주 가는 철사가 나선형으로 말린 모양인데 그게 흐트러지면 시간이 안 맞거든요. 워낙 섬세한 부품이라서 오래 배운 친구들도 손을 잘 못 대는 건데, 아빠는 단 3분 만에 고치더라고요."

지난 14일 오후, 확대경을 끼고 손님이 맡긴 시계를 고치는 주복씨의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계속 울렸다. 등 뒤에서 시계 고치는 모습을 보던 형욱씨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빠, 문자 왔어요." 아버지는 돌아보지 않는다. "아버지가 귀가 잘 안 들리세요. 건강하셔야 하는데…." 아들은 말끝이 흐린데, 아버지는 호탕하다. "녀석아, 내가 10년은 더 할 수 있다!" 아버지는 말했다. "그전까지 얘는 학원도 다니고, 나한테도 배우고, 외제 시계 수리하는 회사에 들어가서 영어도 익히고 하면서 집중적으로 익혀야 해요. 나도 10년을 배운 후에야 처음 롤렉스를 고쳤어요. 숟가락질만큼 (시계 수리에) 익숙한 경지에 다다르지 않으면 가게를 물려줄 수 없어요."

주복씨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49년 동안 자신이 쌓아온 네트워크도 아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시계 수리는 장인을 중심으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분업을 할 때가 잦다. "시계 문자판 그리는 사람, 유리 깎는 사람, 금속 광내는 사람…. 누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데만 여러 해가 걸려요. 나는 최고 실력자들과 '형님, 아우' 하는 사이거든. 아들 실력이 좀 쌓이면 며칠씩이라도 보내서 일하는 모습을 보게 하려고 해요. 네트워크가 탄탄해야 이 작은 가게에서도 모든 수리를 다 맡을 수 있지요."

아들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토를 달았다. "저는 좀 큰 가게로 이사 갔으면 좋겠어요…." 아버지는 껄껄 웃었다. "자기가 돈 벌어서 나가든지 말든지, 뭐."

우린 시간의 마술사

롤렉스 맡긴 지 5년 만에 찾으러 온 조폭, 부모님 유품 들고 온 손님… 시계는 주인을 닮은 소우주

◇"태엽을 감았다. 아버지가 움직인다"

주복씨는 단골들을 생각하면 가게를 옮길 수 없다고 했다. 얼마 전엔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한 남성이 "(교도소에서) 수행 좀 하고 왔다"며 5년 만에 롤렉스 시계를 찾으러 왔다. "생전에 여기서 고치셨다고…"라면서 세상을 뜬 부모님의 시계를 가져오는 사람들도 종종 있다. 이들은 때로 낡은 시계 값보다 더 많은 돈을 내고 시계를 고쳐간다. "태엽을 감아서 시계가 가면 어머니·아버지가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다고 말해요. 시계는 늘 몸에 지닌 물건이라 주인의 습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지요. 꾸미기 좋아하는 아가씨의 시계에선 꽃 냄새가 나고, 성질 급한 사람의 시계를 열어보면 유사가 헐겁고…."

시계 장인들은 대부분 시계를 고친 다음 자신만 알아볼 수 있는 일종의 서명을 시계 안에 작게 써넣는다. 주복씨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01701305R'은 '수리비 17만원(017) 받고 2013년 5월(01305)에 로렉사(R)가 고침'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형욱씨는 먼먼 미래의 어느 날 시계를 열었을 때 아버지의 글씨와 마주칠 것을 떠올린다. "아… 아무래도… 그런 시계는 결국 손을 못 댈 것 같아요. 아빠가 만진 시계를 제가 더 망가뜨리거나 하면 안 되잖아요." 아버지가 아들 등을 탁 쳤다. "야, 이 녀석아. 나는 미제(美製) 껌 녹인 걸 본드 대신 쓰면서 배웠다. 도구가 이렇게 좋아졌는데 왜 못해? 해야지! 내가 만진 걸 가져오면 네가 더 잘 고쳐야지. 아이고, 걱정이네. 저렇게 맘이 여려서 험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