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고령화… 잿빛 재료에 웃음을 버무렸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아버지의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름 묵묵히 일을 했더니 종국에는 자식들에게 고집스럽고 말이 안 통하는 늙은이로 기억되는 것이다. 제66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상영된 알렉산더 페인(52·사진) 감독의 '네브라스카'는 이런 아버지 세대에 대한 강력하고도 아름다운 찬가를 보낸다.

일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아버지 우디 그랜트(브루스 던)는 치매기를 보이더니 어느 날 갑자기 당첨 상금 100만달러(약 12억원)를 받기 위해 네브라스카주 링컨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형은 요양원에 보내자고 주장한다. 틈만 나면 집에서 빠져나와 네브라스카로 하염없이 걸어가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둘째 아들 데이빗(윌 포르테)이 그를 네브라스카에 모시고 가기로 한다. 상금 따윈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버지를 단념시키기 위해선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족이 사는 몬태나주 빌링스에서 네브라스카 링컨으로 가는 길에 아버지가 나고 자란 네브라스카 호손을 들러 아버지의 여섯 형제와 마을 사람들을 만나 말없이 매일 술만 마셨던 아버지의 과거를 알게 된다.

미국의 중서부는 그 나라의 가장 평범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주로 촌스럽고 순진하거나 보수적인 '시골 사람'으로 많이 그려진다. 이미 경제적으로 쇠락한 이곳은 황량하다. 마을에는 노약자만 남았고, 몇 안 되는 젊은이들도 할 일이 없다. 이들은 거실에 모여 앉아 무표정하게 TV를 보거나 맥주를 마신다. 오래전 마을을 떠난 우디가 100만달러 상금에 당첨됐다는 소문이 돌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영웅시한다.

가장 평범한 사람들의 언어에서 유머를 이끌어내는 재주가 있는 페인 감독은 시골 사람들을 이용해 뒤틀린 유머를 선보인다. 뚱뚱하고 백발이 성성한 어머니가 걸핏하면 "마을 남자들이 다 나를 좋아했다"고 우기거나 우디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위해 남의 집에서 공기 압축기를 훔치는 장면에선 객석에서 박장대소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그 웃음은 시골 사람들에 대한 비웃음과 조롱보다 애정과 애잔함에 더 가까웠다. '네브라스카'는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한 시절을 견뎠을 지난 세대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는 흑백으로 촬영됐다. 미국 중서부의 스산함을 강조하기 위해 쓰인 이 방법은 오히려 볼거리 하나 없는 이곳의 아름다운 속살을 보여준다. 이파리 하나 없이 앙상하게 마른 나무와 텅 빈 도로는 마치 에칭(산의 부식 작용을 이용하는 판화)이라도 한 것처럼 스크린에 새겨진다. 여기에 흰머리를 나부끼며 고속도로를 어기적어기적 걸어 다니는 브루스 던의 탁월한 연기까지 더해져 '네브라스카'란 제목이 부끄럽지 않을 영화가 만들어졌다.

알고 보니 영화 속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한 뒤 말수가 적어지며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진짜 사랑'을 만나 잠깐 외도를 했지만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한 그는 언제나 손해만 보고 살았다. 늙은 아버지의 주름 사이사이에 배인 그의 과거와 진심을 보려는 이 영화를 한국에 있는 가장 평범한 아버지와 그 아들딸들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