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직업은 다르지만 그 누구보다 자동차를 사랑한다는 점에서 서로 닮은 세 남자. 이들이 고백했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은 드림카에 대해,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자신의 무한 애정에 대해.
ALFA ROMEO 8C 2900B
“자연스럽게 휘어진 곡선, 이것이 진짜다”
스쿠프, 티뷰론, 소나타, 산타페 등 쟁쟁한 ‘작품’들을 연이어 탄생시키며 한국 자동차 디자인계의 전설이 된 박종서(66) 전 국민대 교수. 그가 꼽은 드림카는 알파로메오 8C 2900B다. 알파로메오 8C 2900B는 1930년대 ‘도로 위를 달리는 스포츠카’로 명성을 얻은 차. 1938년 출시 당시에는 가장 빠른 양산형 모델이었다고. 그러나 정작 오늘날 알파로메오 8C 2900B의 많은 팬들은 그의 역동적인 주행 성능보다 특유의 디자인을 갈망한다.
박 전 교수는 “디자인에 관한 유명한 경구 중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말이 있다. 알파로메오 8C 2900B는 이 말에 가장 부합하는 차다”라고 말한다. “오늘날 이 말은 종종 디자인을 속박하려는 의미로 곡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사실 이는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라. 우리가 오랫동안 아껴 써온 물건들은 하나같이 형태가 기능을 따른 것들이 아닌가.”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배제한다는 것. 이는 단순성과도 유관한 말이다. 그에 비해 요즈음의 자동차에는 불필요한 장식, 선(線)이 너무 많다고 박 교수는 평한다. 절제를 잃어버렸다고 보는 것이다. “원래 사회가 혼란스러울 때 가짜가 나오고 허풍이 세진다. 이 시대가 그렇다. 자동차를 비롯한 모든 물건이 그런 식이다.”
그런 그는 알파로메오 8C 2900B의 선을 높이 산다. 자연스럽게 휘어진 나무의 곡선이 그대로 자동차의 틀을 이루었다. 실제로 알파로메오는 선이 곱기로 유명한데, 때문에 혹자는 알파로메오를 여체(女體)를 가장 빼닮은 자동차라 칭하기도 한다.
1979년부터 25년간 현대자동차 디자인연구소를 이끈 박 전 교수는 이후 10년간 국민대 공업디자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 지난 2월 정년퇴임을 하고 지금은 고양시 대자동 작업장에서 클래식카 모형 제작에 열중하고 있다. 실물과 똑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옛날 명차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옛날엔 디자인 도안이랄 게 없었다. 그냥 망치를 들고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그 방식 그대로 만들고자 한다.” 모든 공정이 수작업이었던 탓에 8C 2900B는 당시 6대밖에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박 전 교수는 “아직 8C 2900B의 실물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나무로 틀을 만든 다음 알루미늄판을 입혀 망치로 두드리기를 반복하는 박 전 교수의 손끝에서 알파로메오 8C 2900B와 페라리 250 테스타 로사 등 옛 명차들은 현재 거의 모습을 드러낸 상태다. 직접 망치를 두드리며 ‘아트 오브 노이즈(art of noise)’라는 말을 실감했다는 박 전 교수는 6월이 오기 전에 8C 2900B 복원 작업을 마무리할 계획이다. 옛 이미지 자료를 참고해 도안을 만들고, 이탈리아 장인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 시절 그 방식대로 자동차를 만드는 데는 꼬박 3~4년의 시간이 소요된 셈.
이렇게 제작된 모형들은 2015년 고양시 향동에 문을 여는 자동차디자인박물관에 전시될 예정이다. “클래식카를 복원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다. 요즘의 아이들은 아날로그를 모른다. 디지털이 전부인 줄만 안다. 갑옷을 만들다 마차를 만들고, 또 마차를 만들다 자동차를 만들었다는 것을 가르쳐주면 아이들이 얼마나 재미있어 하겠나.” 자동차와 그 자동차가 가진 여러 사연을 함께 소개하고자 하는 이번 박물관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오늘날의 자동차가 갖지 못한 자연의 선을 다시 되살려볼 작정”이라고 강조한다.
박종서 전 국민대 교수의 드림카는 알파로메오 8C 2900B. 1930년대 ‘도로 위를 달리는 스포츠카’로 명성을 얻은 8C 2900B는 독특한 디자인, 특히 선(線)이 지닌 특유의 미감으로 많은 팬들을 사로잡고 있다.
강재형 | MBC 아나운서
Porsche 993
“공랭식 엔진 특유의 탈탈거리는 소리에 반했다”
자동차 경주 중계로 친숙한 강재형(52) 아나운서. 1987년 MBC에 입사한 강 아나운서는 레이싱 중계 경력만 15년이 넘는 베테랑이다. F1 가이드북을 출간하는가 하면 본인이 직접 아마추어 레이서로 경주에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 그의 드림카는 다름 아닌 포르쉐 993.
포르쉐 993은 포르쉐의 간판스타인 911 계열 탄생 30주년을 기념해 1993년 선보인 자동차다. 911 계열에서 마지막으로 공랭식 엔진을 쓴 차로 유명하다. 강 아나운서는 공랭식 엔진 특유의 ‘탈탈거리는’ 소리를 좋아한다. 993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이기도 하다. “요즘 차는 기계가 아닌 전자제품 같다. 차가 알아서 다 해주니까 운전자의 몫이 거의 없다. 편리해서 좋긴 하지만 그만큼 재미도 없는 것 같다. 기어를 밟고 나가는 재미 말이다.”
자동차의 클래시컬한 면모에 끌린다는 강 아나운서는 이미 드림카 포르쉐 993을 몇 차례 시승해본 경험이 있다. 영업점에 993이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면 부리나케 달려간 결과다. 아직은 마땅한 것을 발견하지 못해 구매를 미루고 있는 중이라고. 대신 그는 1975년식 폭스바겐 비틀 클래식으로 993에 대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1990년대 초 구매한 앙증맞은 하늘색 비틀이다. 클래식에 가장 가까운 원형을 지닌 비틀 역시 공랭식 엔진. 포르쉐 993과 같은 ‘탈탈거리는’ 소리가 매력이다. “고전(古典)은 변치 않는다. 불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도 그 가치가 시들지 않는다는 의미다. 포르쉐 993도 그렇고, 폭스바겐 비틀도 그렇다.”
강 아나운서는 오래지 않아 포르쉐 993의 오너드라이버가 될 작정이다. “얼마 전 이런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갈망하던 차를 샀다고. 설레는 마음으로 운전석에 앉아 룸미러를 봤더니 그 속엔 백발성성한 낯선 이가 앉아 있더란다. 마침내 드림카를 손에 넣었지만 세월이 너무 흘러버린 것이다.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그래서 결심했다. 더 늦기 전에 갖고 싶은 차를 가지기로. 여태껏 나는 열심히 일하며 잘 버텨왔으니, 욕심을 좀 내도 괜찮지 않을까(웃음). 한 5년 안에는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LAND ROVER DEFENDER
“신발로 치면 등산화… 거친 땅에서도 문제없다”
올해로 24년째 자동차 사진을 찍고 있는 오환(49) 작가. 국내 최초의 자동차 사진전인 ‘로드 임프레션’을 시작으로 ‘스피드’, ‘모터스포츠’ 등의 사진전을 차례로 개최하며 명성을 쌓은 오 작가는 현재 코리아스피드페스티벌(KSF)과 헬로모바일 슈퍼레이스 챔피언십의 오피셜 사진작가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그의 드림카는 랜드로버 디펜더. 디펜더는 강력한 힘과 견고한 차체로 유명한 랜드로버의 대표 모델로, 4륜구동의 기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것으로 평가된다. 어떤 거친 길도 거뜬히 달리는 터프한 매력을 지녔다.
어릴 적 영화 ‘부시맨’에서 디펜더를 처음 봤다는 오 작가는 “인위적인 느낌이 전혀 없다. 자연 그대로다. 아날로그 감성 그대로다”며 디펜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신발로 치면 디펜더는 등산화다. 어떤 거친 땅이라도 문제없다. 전천후다. 사진을 찍으러 산길이나 눈길을 뚫고 험난한 지역을 다녀야 하는 내게는 최적의 차가 아닌가.”
운이 좋게도 오 작가는 이미 자신의 드림카를 몰아본 경험이 있다. 디펜더는 아직 국내에 정식 수입되지 않은 모델임에도. “1998년경 BMW에서 디펜더 두 대를 들여왔다. 그중 한 대인 빨간색 디펜더 90을 타고 열흘간 여행한 적이 있다.” 당시 한 광고제작사가 주최한 프로젝트에 참여한 오 작가는 1999년 12월 27일부터 열흘간 한라에서 백두까지 디펜더를 타고 달렸다.
하지만 여행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히터가 고장난데다 오픈카였다. 겨우 천막을 얼기설기 씌워 달렸는데 무척 애를 먹었다. 당시 백두산 기온이 영하 50℃였다. 야외 화장실에서는 엉덩이가 시려 바지도 못 내릴 지경이었다.”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으로 겨우 버틸 수 있었다는 그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차의 히터는 고장난 게 아니었다는 사실. 그저 오 작가가 탔던 디펜더는 아프리카 버전이었을 뿐. 애초에 히터는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 작가는 머지않아 디펜더를 손에 넣을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7년 안에는 구매할 수 있지 않을까. 디펜더를 타고 사진도 찍고, 여행도 하고… 무엇보다 수해나 산사태가 난 오지에서의 봉사활동을 생각하고 있다. 악천후에도 끄떡없는 자동차이니만큼, 구호물품을 실어나르는 데 제격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