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운드와 퍼포먼스에 사로잡힌 '무경계'의 베니스

지난 31일(현지 시각) 오전 10시 베네치아 본섬, 국가별 전시관이 밀집한 자르디니(정원) 공원의 문이 열리자 줄을 서 있던 관객이 일제히 달리기 시작했다. 이상 저온에 비바람 몰아치는 궂은 날씨, 옷에 흙탕물이 튀고, 신발이 흠뻑 젖었다. "Run for art(예술을 향해 달려)!" 기자를 추월하던 기 반 트와일(72) 전(前) 암스테르담시립미술관장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는 "1972년부터 매번 베니스 비엔날레에 왔는데 달리기를 해 가면서까지 전시를 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관객들이 숨을 헐떡이며 도달한 곳은 미디어 아티스트 안리 살라(39)를 대표 작가로 내세운 프랑스관. 프리뷰 첫날인 지난 28일부터 좋다고 소문이 나 입장까지 대기 시간이 평균 2시간 이상 걸린다.

◇사운드와 퍼포먼스의 승리

1일(현지 시각) 개막, 11월 24일까지 열리는 제55회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사운드와 퍼포먼스가 웃었다. 나흘의 프리뷰 기간에 연일 가장 긴 줄을 세우며 비공식 '인기상'을 거머쥔 안리 살라는 이미지와 사운드를 감각적으로 엮는 게 특기. 이번에 내놓은 '라벨 라벨 언라벨(Ravel Ravel Unravel)'은 모리스 라벨의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하는 두 피아니스트의 손을 클로즈업했다. 콘서트홀 못지않은 음향이 20분45초간 관객을 매혹한다.

5명으로 구성된 비엔날레 심사위원들이 본 전시 참여 작가에게 주는 황금사자상은 영국 퍼포먼스 연출가 티노 세갈(37)에게 돌아갔다. 단편영화급 영상이나 연극에 가까운 퍼포먼스 같은 '무경계 예술'이 주목받는 요즘 현대 미술의 트렌드가 공식·비공식적으로 반영된 셈이다.

현재 베니스에서는 비엔날레 외에도 많은 전시가 열린다. 그중 가장 오래 줄을 서야만 하는 전시는 지난 1일 프라다 파운데이션에서 개막한 '태도가 형식이 될 때'. 스위스의 전설적 큐레이터 하랄드 제만이 1969년 베른에서 연 전시를 독일 사진가 토만스 데만트와 네덜란드 건축가 렘 콜하스가 재해석했다. 최대 수용 인원이 200명이라 개막 첫날인 1일엔 입장 대기 시간이 평균 4시간이었다. 개념 위주의 어려운 전시라 기획자에겐 지적 즐거움을, 일반 대중에겐 두통을 안겨줄 듯하다.

◇'예술'의 탈을 쓴 정치 게임

베니스 비엔날레는 '미술'을 가림막으로 내세운 국가 간 정치 게임의 장(場). 오랜 숙적 프랑스와 독일은 양국 우호조약 체결 50주년을 기념해 서로 국가관 건물을 바꿔서 전시를 열었다. 서로 마주 본 이 두 전시관엔 프리뷰 기간 내내 경쟁이라도 하듯 긴 줄이 늘어서 있었다. "각 국가관이 줄을 더 길게 보이게 하려고 전략적으로 소수 인원만 들여보내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강대국들은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기 위해 제3세계 작가들을 적극적으로 내세웠다. 독일은 참여 작가에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56)를 비롯해 남아공, 인도 작가 등을 포함했고 프랑스관의 대표 작가 안리 살라 역시 알바니아 출신이다. 미국관도 중국계 여성 작가 사라 지(44)를 내세웠다. 국가관 황금사자상은 올해 처음 출전한 앙골라에 돌아갔다.

◇본 전시는 광주비엔날레의 확장판

"광주에서 '연습 게임'하고, 베네치아에서 '본 게임'을 했다."

마시밀리아노 지오니(40) 총감독이 기획한 본 전시를 관람한 한국 미술계 인사들의 반응이다. 2010년 광주비엔날레 총감독을 맡았던 지오니는 광주와 유사한 작가군, 구성의 전시를 선보였다. 참여 작가 153명 중 브루스 나우만, 신디 셔먼, 폴 매카시, 티노 세갈 등 36명이 광주와 겹친다. 지나치게 개념적인 작가보다는 쉽고 강렬한 이미지를 내놓는 작가 위주로 전시를 꾸미고, 작품 설명 카드를 상세히 써서 관객을 배려한 점은 이번 비엔날레의 장점. 뉴욕에서 왔다는 데니스 카라초(60)씨는 "이번이 6번째 베니스 비엔날레 관람인데 전시 구성이 좋다. 미술관에 와 있는 것 같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