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삭발하던 날… 경영자로서 새로 태어나

나는 2006년 말 음료 회사인 동아오츠카 사장으로 취임했다. 경영을 책임진 사장이다 보니 흑자 경영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컸고, 항상 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상황이 순탄치는 않았다. 음료는 여름이 대목이다. 그런데 이듬해인 2007년은 6월 하순부터 비가 많이 내렸다. 비 오는 날이면 우울했다. 아이스크림 장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음료 또한 일기예보에 민감한 업종이다. 아무리 아이디어를 짜내서 기가 막힌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해도 비가 많이 내리면 영업 실적은 그야말로 '꽝'이다. 음료는 여름이 성수기라도 비가 내리면 매출이 3분의 1로 뚝 떨어진다.

설상가상으로 노조와 벌이는 임금 협상이라는 큰 산 또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사장이 바뀐 뒤 처음 하는 임금 협상이니만큼 노조가 조금은 부드럽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기대는 큰 착각이었다. 여섯 차례나 협상했지만 진척 없이 제자리만 계속 맴돌았다. 지끈지끈 머리가 아팠다.

날씨도 덥고 해서 기분 전환 겸 이발을 하러 갔다. 의자에 앉자 이발사 아저씨가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하고 물어보길래 무심코 충동적으로 "밀어 주세요" 하고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눈을 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는데, 어느 순간 바리캉 소리가 "윙-" 하고 들렸다. '아차' 하면서 눈을 떴지만 이미 바리캉이 머리 한가운데를 지나고 난 뒤였다.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답답한 기분에 무심결에 나온 말이지 진짜 작심하고 '밀어버리려'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손으로 머리를 만져보았다. 온통 까슬까슬해진 거죽을 매만지며 한참을 뚫어져라 거울 속 남자를 봤다. 낯설었지만 바로 내 모습이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홀가분'이란 단어는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뜻하지 않게 삭발했지만 각오를 새롭게 다지기엔 충분했다. 동아오츠카를 흑자 경영으로, 또 신제품 개발로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다음 날 출근을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이 머리로 아버지(강신호 회장)를 어떻게 뵐 것이며, 직원들은 또 어떻게 생각할지….

다음 날 회사로 출근해 일찍 매를 맞자는 심정으로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호통을 들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뜻밖에 빙긋이 웃으시며 "웬 스님이 들어오는 줄 알았다"는 말씀뿐이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막내아들이 아닌 경영자로서 내 각오와 결심을 응원해주신 게 아닌가 싶다.

삭발은 기대하지 않았던 효과를 가져왔다. 꽉 막혀 있던 노사 협상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협상 테이블에 나가자 노조 대표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보통 삭발은 노조 대표들이 마지막 투쟁 수단으로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사장이 삭발을 하고 협상장에 나타났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협상을 시작하면서 "지금은 회사가 어려워 노조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반드시 회사를 발전시켜 다 들어 주겠다"고 호소했다. 나중에 들으니 노조가 "처음엔 사장 말을 믿지 않았는데 삭발까지 한 것을 보니 결심이 확고해 보인다"며 내 제안을 수긍했다고 한다.

사실 동아오츠카를 처음 맡았을 땐 눈앞이 캄캄했다. 적자는 둘째 치고 직원들 사기 저하가 큰 문제였다. 이직률도 높았다. 신제품을 만들었으나 연속으로 실패하면서 의욕이 떨어졌던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기 위해 20년 전 나를 데리고 다니면서 현장 영업을 가르쳤던 음료 배달 트럭 영업맨을 찾아가 직접 애로 사항을 들었다. 배달을 하면서 생수를 자비(自費)로 사 마시는 직원이 많다는 얘기를 듣고선 차량용 소형 냉장고를 직원들에게 선물했다. 지점에서 생수를 공급받아 배달할 때 마실 수 있게 했더니 모두들 몹시 고마워했다. 이직률도 많이 떨어졌다.

직원들 사기가 회복되자 실적도 좋아졌다. 이듬해 업계 전반의 침체에도 불구, 음료업계 중 유일하게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간판 제품인 포카리스웨트에만 의존하지 않고 녹차 음료와 검은콩 음료 등 신제품 개발에 몰두한 결과였다. 특히 검은콩을 원료로 만든 음료인 '블랙빈테라티'가 기억에 남는다. 당시 편찮으신 어머니께 좋은 음식이 뭘까 찾다가 발견한 것이 검은콩이었다. 검은콩에는 여성호르몬의 밸런스를 맞춰주는 물질인 이소플라본이 많이 들어 있어 음료로 만들면 큰 인기를 끌겠다 싶었다. 내 진심을 알아주고 열심히 뛰어준 직원들 노력의 결과로 나온 제품이라 지금도 애정이 간다.

아버지는 늘 "회사의 가장 큰 재산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아버지의 경영 철학을 따르고 있다. 능력 있는 사원보다 사풍에 맞는 정직한 사람을 더 원한다. 건강을 지키는 사업을 하는 회사기 때문에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하는 것 자체가 사회봉사이며 애국하는 길이라고 믿는다. '직원들이 다니고 싶어 하는 회사 만들기', 그것이 나의 경영 목표이다.

2007년 어느 여름날의 삭발은 지금까지 내가 회사를 경영하는 데 많은 가르침을 줬고 동기를 부여했다. 삭발 자체가 뭐 그리 큰일은 아닐 것이다. 머리카락은 금세 자랐다. 하지만 그 삭발로 나는 경영자로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직원들과 소통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기 때문이다. 삭발은 내가 회사 경영에 임하는 책임감과 결의를 노조원, 현장 직원들과 나누는 일종의 소통 수단으로 작용했다. 요즘도 가끔 그때 그 기분을 다시 한번 만끽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강정석 사장은]

강정석(姜廷錫·49)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은 동아제약 창업주인 할아버지 고(故) 강중희(姜重熙) 회장, 전경련 회장을 지낸 아버지 강신호(姜信浩·88) 동아쏘시오그룹 회장의 뒤를 잇는 3세 경영인이다. 지난달 강신호 회장이 보유한 주식 전량을 양도받아 경영권 승계를 마쳤다.

강 사장에게는 이발과 얽힌 또 다른 얘기가 있다.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대 유학 시절 찢어진 청바지에 장발을 하고 다녔다고 한다. 어느 날 집안 행사가 있어 귀국한 뒤 눈물을 머금고 긴 머리부터 자르고 집에 들어갔는데, 아버지 강신호 회장이 조용히 돈을 쥐여주며 "남들 보기 전에 빨리 머리를 깎고 와라"고 했다. 강 회장에게 여전히 장발로 보인 것. 그날 강 사장은 하루에 이발을 두 번 했다.

강 사장은 중앙대 철학과를 나왔다. 제약사 경영자로서 연구개발(R&D)에 대한 전문성을 키우기 위해 철학 전공자로선 드물게 성균관대 약대 대학원도 나왔다. 1989년 동아제약에 입사해 경영관리팀장과 영업본부장(전무이사)을 거쳐 2007년 대표이사 부사장을 맡았다. 지난 3월 지주회사인 동아쏘시오홀딩스 사장이 돼 전문 의약품 중심의 동아에스티와 박카스 등 일반 의약품 전문 동아제약을 지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