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주의'와 '原子力 마피아'가 원전 비리 불렀다"

"원자력 정책의 성공은 결국 국민이 정부를 신뢰하느냐 신뢰하지 않느냐에 달렸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용서받지 못할 일"이라며 개탄한 최근의 원전 비리에 대해 김명자(69) 전 환경부 장관은 "비리 관련자만 문책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라고 일갈했다.

"한국 원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냐고 해외 전문가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어요. 전문가 풀(pool)이 너무 좁은 학맥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더군요. '원자력 마피아'라는 거죠. 거대 위험 기술을 '온정주의', '설마~주의' 정신으로 관리하는 실태도 매우 심각합니다. 원전 부품만 100만~200만개라는데 우리는 그에 대한 표준, 운영체제와 안전규제에 대한 매뉴얼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습니다."

17대 국회의원이었고 역대 최장수(3년 8개월) 여성장관 기록을 가진 김명자 전 장관은 자타가 공인하는 원자력 전문가다. '사용후핵연료 중간 저장시설 공론화위원회' 위원장으로 거론되고 있으며 '원자력 딜레마'에 이어 최근 '원자력 트릴레마'도 펴냈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한국여성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총서의 첫 책이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가 원자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80년대 숙명여대에서 과학사를 강의하면서다. "'왜 과학자들이 원자탄이라는 무기를 개발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됐죠." 환경부 장관, 국회 국방위원회를 거치면서 원전에 대한 고민은 깊어지고 세분화됐다. "원자력 산업은 대표적인 기술 위험 산업이지만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갇혀 있어요. 재생에너지요? 고밀도, 고층, 고집적 주거 형태인 한국에서 주요 에너지원으로 태양과 바람을 쓸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화석연료 의존도 84%, 해외 수입률 97%인 나라에서 유일하게 가진 게 원자력 에너지 기술인데 이걸 어떻게 줄이겠습니까."

새 책의 제목을 '트릴레마'로 바꾼 것은 '원자력에 대한 찬성과 반대 사이의 중간 지대에서 해법을 찾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여성이 남성보다 원자력을 반대해요. 그래서 아기를 낳고 살림을 하는 여성 과학자의 시각에서 원자력을 다루는 것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죠." 내일모레 칠순인데도 '일벌레' 습성을 버리지 못한 그는 인공눈물을 넣어가며 글을 썼다고 했다.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는 것을 막으려고 타이머를 설치했을 정도다. 지난달엔 한국여기자협회 이슈포럼 참석차 스웨덴 원전 현장을 둘러보고 왔다. "원전강국이라 해도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고 있더군요. 다만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정부와 기업이 기울이는 어마어마한 노력과 인내에 감동했습니다."

김 전 장관을 만난 지난 3일은 '한·미 원자력협력 협정' 7차 개정 협상이 시작된 날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 정부가 미국 측에 강력히 요구하는 재처리·농축 권한 허용은 그리 시급하거나 중요한 일이 아니다" 라고 했다. "미국, 스웨덴 등 원전 강국들도 재처리를 하지 않습니다. 경제적, 기술적으로 실용성이 떨어지기 때문이죠. 외교적 상황만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재처리에 매달리기보다는 포화 상태에 이른 우리 원전의 방사성폐기물의 중간 저장 해법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합니다." '우리도 핵주권국이 돼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는 "공포의 균형(The balance of Terror)은 20세기가 빚어낸 시행착오로 끝나야 한다"고 답했다.

그는 장관 재임 시절 '3대강 물관리 특별법'을 둘러싼 정부와 지역 주민의 첨예한 갈등을 끊임없는 소통으로 풀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장관 화형식까지 불사했던 주민들을 일일이 만나 허물없이 대화하고 수백통의 편지를 써서 합의점을 도출해낸 일화는 유명하다. "내가 여성이었고, 교수 출신인 데다 과학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직원들에게도 모든 업무를 내 가족의 일처럼 여기며 하라고 부탁했죠. 원자력 문제도 신뢰의 실마리부터 찾아야 합니다. 정치적 결정, 부처별 이익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인지부터 토론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