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피하려 태어나 액션 영화 촬영지 된 '회오리'

1977년 개관한 서울 중구의 뉴국제호텔은 '아찔한' 외부 철제 계단이 두드러지는 건물이다. 17층 꼭대기부터 지상까지 단 한 차례의 쉼 없이 나선형으로 빙글빙글 이어져 있다. '오래된 외부 철제 계단'이 이 호텔에만 있는 건 아니다. 30~40년쯤 된 건물이면 대개 이런 계단이 외벽에 매달리다시피 붙어 있다. 그것도 녹이 슨 채 아슬아슬하게.

이 계단은 왜 만들어진 걸까? 정답은 '소방법' 때문이다. 이 계단의 정식 명칭은 '피난 계단'. 화재시 지상이나 옥상으로 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계기는 수많은 사상자를 낸 서울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1971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 사건(1974년) 등 1970년대 잇단 대형 화재 사건. 이후 서울시는 모든 신축 건물에 '피난 계단'을 설치하도록 했다.

당시 건물 대부분이 현대적 방화 시설을 갖추지 않아 "무조건 불과 연기를 피해 외부로 사람을 내보내야 했고, 이 때문에 피난 계단 대부분이 외부에 설치됐다"(임형남 가온건축 소장)고 한다. 건축가·건축주들도 피난 계단을 건물 외부에 설치해 건폐율(건축면적 대비 연면적 비율)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1980년대 말 고층 건물이 늘고 첨단 방화 시설이 보급되면서 피난 계단은 건물 내부로 들어오게 된다. 김창길 삼정건축 소장은 "현대의 비상계단은 방화 기능까지 갖춘 '멀티 공간'"이라고 했다.

뉴국제호텔도 실내 비상계단이 있지만 '마지막 피난 수단'으로 이 회오리 철제 계단을 남겨놨다고 한다. 그러나 1970~80년대 지어진 소형 건물의 외부 철제 계단은 이제 거의 용도가 없어지고 누아르·액션 영화 촬영 장소로 인기 높은 대표적인 도심 속 '빈티지'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