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금융위기 이후 조세정보교환 협정 확산… 조세피난처들 속속 '비밀주의' 포기

애플, 구글 같은 글로벌 기업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대규모 절세를 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조세피난처를 이용하는 게 어디까지가 합법이고 불법인가가 국제적으로 주된 관심사가 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1998년 조세피난처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대한 보고서를 내면서 조세피난처 지정 기준을 세율, 조세정보 교환(비밀주의), 조세행정 투명성, 실질경제활동 여부 등 4가지로 제시한 바 있다. OECD는 조세피난처 지정 기준을 제시하면서 실제 지정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세율 자체가 아니라고 언급하고 있다. 세율은 나라마다 다를 수 있고 저(低)세율을 좇는 자본의 움직임 자체가 자원 배분은 왜곡할 수 있어도 불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OECD는 중요한 기준은 '투명성'과 '비밀주의'라고 언급하고 있다.

◇OECD, 40여개 지역을 조세피난처로 지정

OECD는 40여개 조세피난처를 세율에 따라 무세국(無稅國), 저세율국, 국외소득 면세국(tax shelter), 특정 사업 혹은 기업 조세우대국으로 나눈다. 버뮤다, 케이맨군도, 바하마 등은 무세국에 해당하며, 최근 한국인 계좌가 발견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앤틸리스 등은 저세율국, 홍콩, 말레이시아 등은 국외소득 면세국, 마지막으로 최근 애플사의 조세회피처로 활용된 아일랜드, 룩셈부르크 등은 특정 법인 혹은 사업소득 조세우대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제공되는 서비스에 따라 조세피난처는 크게 역외금융센터와 역외경영관리센터로 나눌 수 있다. 역외금융센터는 다국적기업의 금융 자회사를 유치하여 다른 자회사를 위해 자금조달과 투자활동을 지원한다. 역외경영관리센터 기능은 조세피난처에 설립한 자회사로 하여금 다른 자회사들의 광고, 회계, 연구개발, 법률자문 등의 업무를 지원한다.

사실 이 모든 기능은 합리적인 이전가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나 조세피난처 자체가 조세행정의 투명성이 낮고 비밀주의가 강해 이전가격의 적절성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불법적 역외 탈세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기도 한다.

비밀주의로 인해 조세피난처를 통하는 자산규모가 얼마인지는 정확하게 추정이 불가능하다. 그나마 역외금융센터를 통하는 자산규모에 대해서는 IMF(국제통화기금)가 추정한 바 있는데, 2009년 금융자산 기준으로 5조달러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GDP) 규모(1조달러)의 5배 정도 된다.

◇조세피난처 규제는 왜 필요한가

조세피난처에 대한 규제 필요성은 1990년대 후반부터 제기되었다. 아시아 경제위기 이후 자본자유화 흐름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 자본유치를 위한 조세경쟁은 자원 배분을 왜곡하고 시장효율성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더구나, 조세경쟁은 고세율국가의 세수기반(tax base)을 저세율국가가 침범한다는 점에서 재화시장의 가격덤핑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재정덤핑(fiscal dumping)에 해당한다. G7(선진 7개국) 중심의 OECD 조세경쟁포럼은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조세피난처로 지정된 국가들에 유해한 조세제도의 폐지를 권고하기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국제사회의 대응을 한 층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논리도 단순히 시장효율성 차원이 아니라 금융위기 수습비용을 마련하는 데 필요한 재정기반의 확충에 있었다. 선진국의 금융위기로 선진국의 재정고갈이 심화됐다. IMF에 따르면 미국은 재정 적자가 2008년 GDP 대비 6.7%에서 2012년 8.5%로 확대됐고 국가채무는 GDP 대비 76%에서 106%로 급증했다. 선진국 전체로도 재정 적자가 3.5%에서 5.9%로 늘었고 국가채무는 81%에서 110%로 급증했다. 개발도상국의 재정은 안정돼 있는데 미국과 유럽은 금융위기로 재정이 악화되며 국가신용등급까지 하락했다. 그렇다고 재정적 돌파구를 성장에서 찾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주목한 곳이 조세피난처를 통한 역외 탈세 적발이다. 미국 상원은 미국 기업과 고액자산가들의 조세회피로 인해 발생하는 정부 세입의 감소분이 연간 1000억달러에 이른다고 추정하고 있다.

◇국제적인 조세피난처 규제의 방향

가장 확실한 조세피난처 규제는 재정덤핑을 금지하고 비거주자 조세정보 교환을 통해 세원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재정덤핑 규제는 거의 불가능하다. 조세피난처도 하나의 국가단위로서 조세정책의 자율성을 누구도 침해할 수 없다.

조제정책의 자율성 아래서 조세피난처 규제는 비밀주의를 약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방안일 수 있다. 지금의 조세피난처 규제 논의도 이런 흐름에 따라 몇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국제기구 차원에서는 '조세당국 간 조세정보교환협정(TIEA)'이 강화되고 있다. OECD가 주도하는 이 협정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입국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정보교환의 수준도 자동적인 정보교환으로 확대되는 가운데 일부 조세피난처들도 비밀주의를 부분적으로 포기하고 있다.

아울러 조세피난처의 폐해가 단순히 역외 탈세에 머물지 않고 국제적인 자금세탁, 테러 자금지원, 금융시스템 위험 은폐, 금융범죄와 부패 등과의 관련성이 커지면서 금융규제 목적으로 금융안정위원회(FSB)나 자금세탁방지국제기구(FATF) 등에서도 정보교류 등 투명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도 규제가 강화되고 있다. 무엇보다 투자자 스스로 해외금융계좌를 자진 신고하는 제도를 보편적으로 강화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해외금융계좌 미신고자에 대해 형사처벌 근거를 마련하는 등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에는 자발적 신고제도의 한계를 인식하고 미국 등 선진국을 중심으로 고객자산을 보유한 금융회사의 고객정보 보고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투자자산을 관리하는 금융회사에 신고의무를 부과하는 제도(FATCA)를 통해 금융회사가 자금세탁 등 불법적 자금거래를 방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이다.

결국, 현재의 규제 방향으로 볼 때 향후 조세피난처 논의는 각국의 조세자율성과 조세덤핑은 용인하되, 조세와 금융정보 교환을 통해서 세원의 투명성을 강화하여 불법 여지를 최소화할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기업의 입장에서는 세율 차이를 이용한 적극적인 조세회피 전략은 가능할 것으로 보이나, 세원 투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불법적인 역외 탈세는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