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뚜렷한 한국여성들, 낯선 디자인도 과감히 수용하데요"

소년은 목공소 장인들이 쓰다 버린 나뭇조각, 집 거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tapestry·여러 색깔의 실로 짠 장식용 천),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보면 가슴이 설렜다. "구두 수선공처럼 아빠의 가죽 구두를 모조리 뜯어내서 다시 바느질하고, 망치로 치고, 광을 내는 게 제 놀이였어요. 다섯 살 때부터 디자이너가 되기로 결심했으니까요, 하하!"

국내 패션잡화 브랜드 '빈치스벤치'의 총괄 아트 디렉터 빈센트 뒤 사르텔(52)을 만났다. 최근 2013 FW(가을·겨울) 신상품을 고객에게 처음으로 선보이는 발표회에서였다. 루이뷔통(1987~2000)과 로에베(1998~2003) 등 고급 명품 브랜드에서 18년간 가죽 가방을 디자인해 이름을 날린 그가 한국에 온 건 2011년. 1998년 문을 연 빈치스벤치는 그와 협업해 선보인 가방 라인('더 발레')이 국내에서 화제를 일으키자 그를 총괄 디렉터로 영입, 대대적인 브랜드 개·보수 작업에 들어갔다.

빈치스벤치의 김경란 상무는 "독특하면서도 실용성 있는 빈센트 뒤 사르텔의 디자인이 우리 브랜드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거라 확신했다"고 말했다. "16년 전 론칭할 땐 이탈리아의 도로 문양, 르네상스 시대 건물 외관의 아치형 디자인 등에서 영감을 받아 클래식한 이탈리아 문화를 보여주는 데 힘썼지만 젊은 고객을 끌어들이는 덴 한계가 있었어요. 빈센트 뒤 사르텔이 우리와 함께한 후부터 20대 후반 고객이 20~30% 늘었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만들어낸 첫 작품은 주방용품 나이프(knife) 세트였다. "부엌에서 채소 썰고 고기 다듬는 데 쓰는 나이프에 무슨 디자인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중요한 건 '실루엣'"이라 했다. "같은 나이프라도 손잡이와 날의 선(線), 재료, 질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걸 쥔 여인의 실루엣이 달라져요. 가방도 그래요. 배우 그레이스 켈리가 가방 든 모습을 감독 히치콕은 굉장히 아름다운 실루엣으로 그려냈어요.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 뇌리에 우아함 그 자체로 남을 모습이지요." 그는 "내 역할은 부드럽고 군더더기 없는 실루엣에 감성이 톡톡 튀는 팝 컬러로 포인트를 주는 것"이라 덧붙였다.

디자인의 본고장 유럽에서 험난한 경쟁을 이미 경험했지만 "서울의 경쟁도 만만치 않다. 아니, 그보다 더 세다"고 말했다. "한국 여성들은 얼핏 보면 비슷한 스타일의 옷과 가방을 걸치고 다니는 것 같지만 각자 뚜렷한 취향이 있어요. 그래서 낯선 디자인도 과감하게 수용하지요." 그는 "옛날 앤티크 가구에 여러 컬러를 넣어 색다른 감성을 표현한 이탈리아 디자이너 멤피스를 존경한다"며 "나는 크레이지(crazy) 디자이너보다 크리에이티브(creative)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 재료가 좋고 바느질이 잘 되어 있으면서 재밌는 컬러 포인트가 가미돼 있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디자인에 지칠 때면 프랑스 파리에 있는 자신의 개인 스튜디오인 '비밀 도서관'으로 달려간다. 수백 가지의 가죽과 패브릭 등을 전시해 놓았다. 그걸 하나하나 들여다보고 만져보면서 생각을 새롭게 가다듬는다.

승승장구처럼 성공을 향해 달려온 그의 이력에도 부침은 있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루이뷔통에서 일한 첫해에 디자인한 가방이 10만점이나 팔리는 진짜 상품으로 만들어졌을 때. "내 재능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히트를 치면서 자신감을 얻게 됐어요. 디자이너는 상상이 구현돼 나오는 샘플을 보면 제일 행복해요." 반면 "큰 회사에 몸담을수록 정치적 이슈에 휘말릴 경우가 많다"며 "믿었던 동료에게 배신당했을 땐 정말 힘들었다"고 했다. "싫을 때 일은 기억하지 않을래요. 중요한 건 한 방향을 바라보고 가는 거니까.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라도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래서 내 디자인을 고객이 기꺼이 돈 주고 사준다면 최고의 삶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