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 빨리 좀 읽지 그래 아침부터 평상서 돌려보고… 5가구가 공동 구독 하기도 왜 그리도 열심히 보냐고? 알려고 보지, 당연한 걸…
신문, 찢어질 때까지 쓴다 기울어진 땅위 판잣집에선 가구들 수평 맞추는데 사용 27년 누운 욕창 환자 위해 천 시트 대용으로 깔기도
13일 오전 6시쯤 구룡마을의 한 골목길에서 배달 직원이 장독대 위에 신문을 내려놓고 있다. 이곳에 신문을 다 돌리는 데에 40여분이 걸린다.
큰길 안쪽으로 폭 좁은 골목길이 미로처럼 어지럽게 펼쳐져 있어 초행자는 길을 잃기 쉬웠다. / 김지호 객원기자
아침부터 푹푹 쪘던 지난 10일 새벽 5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산 자락. 언제 마지막으로 포장했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길을 파란 다마스 한 대가 재빠르게 올랐다. 가파른 경사에 좌우로 커브가 잦았지만 운전자는 능숙한 솜씨로 산비탈을 올라 중턱에 있는 구룡마을의 한 이름 없는 '구멍가게' 앞에 도착했다. '드르륵' 차 문이 열리고 신문 뭉치가 바닥에 '팡' 하고 떨어진다.
구룡마을에 신문이 막 도착했다. 서울의 마지막 남은 무허가 판자촌 구룡마을엔 174가구 242명의 기초생활 수급자를 포함해 1045세대 2135명이 살고 있다. 이 중 39세대가 7종류 신문을 구독한다. 서울에서 가장 가난한 동네라 구독률은 낮다. 하지만 열독률은 높은 편이다. 구룡마을에 도착하는 신문은 보통 3~6가구를 돌면서 읽힌다. 마지막엔 욕창이 생긴 동네 환자의 시트로 깔려 하루살이를 마친다. 아마도 서울에서 신문을 가장 알뜰하게 사용하는 곳이 구룡마을일 것이다.
매일 아침 이곳엔 신문이 45부 도착한다. 조선일보 29부·스포츠조선 4부 등이다. 구멍가게에 배달된 조선일보·스포츠조선·한국경제 세 부는 오가는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평상에 놓였다.
제일 먼저 이곳을 찾은 김건웅(54)씨는 신문을 집어들고 상에 걸터앉아 1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신문 독자는 다섯 명으로 늘었다. 김씨는 신문 읽기를 멈추고 신문을 펼쳐 해체했다. 신문 총 8장(32면 신문을 펼치면 8장이 됨)을 4장씩 둘로 갈라 나눠주었다. 김씨는 옆에 앉아 자기가 읽는 면의 뒷면 신문을 보던 친구에게 "빨리 읽으라"고 웃으며 타박했다. "거참. 빨리 좀 읽지. 자꾸 밀리잖아."
오전 8시까지 모두 14명이 이 평상에 앉아 활자와 마주했다. 그중엔 자기 집으로 배달된 신문을 갖고 나와 이곳에 있는 다른 신문과 바꿔보는 수도검침원 박명덕(47)씨도 있었다. "스포츠 신문 좀 볼라고…."
◇구룡마을 신문, 온종일 돌고 돈다
출근 시간대의 구룡마을은 시끌시끌했다. 박명덕씨도 구멍가게 평상에서 일어나 출근길에 나섰다. 손에 신문 한 부를 챙겨들고 내려가다 말고 골목길 안쪽으로 꺾어 들어갔다. 그곳엔 공사판에서 다리를 다쳤다는 김모씨가 집 앞에 나와 앉아 신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씨는 "왔나"라고 인사하며 박씨를 반겼다. 박씨는 출근하며 자신이 미리 읽은 신문을 김씨에게 배달했다. 김씨는 "왜 신문을 읽느냐"는 질문에 "알려고 보지. 왜 그런 걸 물어"라며 면박을 주었다. "세상 일엔 장단점이 있잖아요. 그걸 알려주니까. 생각하지 못했던 거. 신문엔 그게 있어." 김씨는 40여분에 걸쳐 신문을 꼼꼼하게 다 읽고 옆집 문 앞에 가지런히 갖다두었다.
옆집이라고 해도 실상 '옆방'에 가깝다. 집은 각목으로 기둥을 세우고 합판으로 벽을 둘러쳐 비닐로 감싼 전형적인 구룡마을 식 판잣집이었다. 이 집을 11㎡(약 3평) 남짓한 쪽방 5개로 나눠 썼다. 느지막이 일어난 옆방 이웃 정인철(66)씨가 문 앞에 놓인 신문을 집어들었다. "경기가 너무나 안 좋아서…. 좋아지기를 바라는 건데, 살아났다 죽었다 하는 걸 신문 안 보면 정확히 알 수 없으니까. (정확히 보려면) 다양하게 봐야 하는데, 우린 그럴 수가 없단 말이야. 여긴 너무 치우쳐져 있으니깐. 기자시니까 잘 알겠네. 내가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거랑, 신문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거랑 같나 안 같나."
점심 무렵 해가 높게 오르면서 기온도 같이 올랐다. 에어컨 없는 구룡마을엔 더위를 피할 곳이 그늘밖에 없었다. 대다수는 집 밖 그늘터에 나와 앉았다. 4지구의 한 골목에서 만난 조지균씨도 집 앞 그늘에 갖다둔 의자에 앉아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관련 기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이 영화는 내가 안 볼 영화인데 이걸 다 보면 본 것 같단 말이지. 이런 영화가 있구나. 아니까 얼마나 좋아. 테레비보다 신문이 낫지. 보고 싶은 거 먼저 볼 수도 있고, 이렇게 널찍이 여유 있게 신문 읽으면 눈치 볼 필요도 없으니까."
한편 같은 시각, 7지구에 배달된 신문 한 부도 방과 방 사이를 돌고 있었다. 이 신문은 정모씨 등 다섯 사람이 3000원씩 모아 신청한 신문이다. 공동 주인 다섯 사람은 차례로 신문을 읽고 다음 사람에게로 건넸다.
◇환자 시트로 使命을 다함
퇴근 시간에 가까워지면서 구룡마을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던 신문들이 제 집을 찾아 나섰다. 신문을 돌려주기 위해 집 밖을 나선 한 주민은 "출근길에 빌려준 신문은 그 사람 퇴근 전에 갖다주는 게 예의"라고 말했다. 돌고 도는 신문 주인은 어떻게 찾는 걸까? 그는 "애당초 아는 사람에게만 빌려주는 거라 신문을 돌려보는 사람들끼린 이게 누구 건지 다 안다"며 "주인 모르는 사람은 신문 빌려달란 말도 않고, 설혹 해도 빌려주지 않아"라고 말했다.
박명덕씨 집 앞에 도착한 최씨는 신문을 다시 한 번 곱게 접어 문 앞에 세워둔 의자 위에 반듯하게 올려뒀다. 온종일 여러 사람 손을 거쳤다고 보기 어려울 만큼 신문은 깨끗했다. 회사에서 돌아온 박씨는 아침에 읽다가 만 신문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만 보면 뭐해. 나 일 나가면 어차피 노는 신문인데. 사람들 보게 해주고 돌아와서 돌려받음 되니까."
저녁에 주인에게 돌아온 신문은 다시 살뜰히 쓰일 때가 잦다. 마을 주민들은 "여긴 특히 더 신문이 쓰임새가 많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구룡마을 판잣집은 기울어진 땅 위에 세워진 가건물이라 수평을 맞출 일이 많다. 바닥과 가구 사이의 틈에 넣을 용도로 신문은 인기가 많았다. 겨울철엔 방한용으로 요긴하다. 창문틈을 채우거나 유리창에 붙이면 겨울철 추위를 막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구룡마을에서 가장 값어치 있게 하루살이를 마치는 신문은 6지구에 배달된 신문이었다. 이곳 주민들은 다 본 신문을 한귀수(65)씨네 집에 갖다준다. 한씨는 20년 넘도록 매일 신문이 필요했다. 27년 전 뇌출혈로 자리에 누운 남편(73)의 침대 시트로 신문을 쓰기 때문이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남편은 등에 욕창이 쉽게 생겼고, 그 때문에 하루에도 몇 번씩 시트를 갈아야 했다. "우리 아저씨가 누워만 계시니까 창이 와가지고 깔 게 필요해요. 천 시트면 좋은데 여기선 힘드니까 깨끗한 신문으로 대신 쓰는 거예요." 모자란 신문을 마을 고물상에 가서 사온다. "이 동네 신문은 고물상에 다 모이니까. 어떨 때는 사장님이 계실 땐 그냥 갖고 오고. 직원이 있으면은 돈을 줘요. 제가 맨날 그러기 미안해서…." 구룡마을 신문들은 한씨네 집에 직접 오든 고물상을 거쳐 오든 한데 모여 마지막까지 알뜰히 쓰이다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