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ly BIZ] "경제의 심장은 역시 제조업… 위기에 더욱 빛난 독일 匠人자본주의에 美기업도 열광"

"10년 전만 해도 세계는 독일 경제를 퇴물로 취급했어요. 다들 21세기 경제 모델은 서비스와 금융, 지식 기반이라며 제조업은 한물갔다고 했어요."

유럽 최대 전략 컨설팅 회사인 롤랜드버거의 버커드 셴커(Schwenker) 사장(CEO)은 2003년 CEO에 취임했을 때를 돌이키며 말했다.

"CEO 취임 후 유럽 각지에서 활발히 강연하며 독일 모델의 우수성을 강조했는데 아무도 안 믿었어요. 진짜 안 팔리는 상품을 팔려고 애쓰는 느낌이었죠. 금융 위기 직전인 2007년 런던에서 영국 임원들을 대상으로 미국과 유럽의 경제 모델을 비교하며 제조업이 강한 유럽식 모델이 우위라고 말했더니 돌아온 건 거의 비웃음 수준의 반응이었어요."

셴커 사장은 잠깐 담배를 피워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당시 감정이 살아나는 듯 말버러 담배를 깊이 빨아들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3년 후 또 런던에서 비슷한 사람들에게 똑같은 내용을 얘기했더니 이번엔 박수가 터져 나왔어요. 2008년 금융 위기 때문에 누가 옳았는지 명백해졌습니다. 안정적 경제의 심장은 바로 제조업입니다. 한때 미국 모델을 좇았던 유럽 국가들도 이제 다시 제조업을 강조하며 재(再)산업화(re-industrialization)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난 곳은 독일 수도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광장 인근 회원제 클럽이었다. 희끗한 머리에 말끔한 회색 양복 차림. 그러나 넓은 어깨와 다부진 체격이 독일 축구 선수를 연상케 했다. 셴커 사장은 1989년 롤랜드버거에 입사해 독일 통일, 동독 재건, 유로존 위기 탈출 등 다양한 분야를 컨설팅해 왔다. 창업주 롤랜드버거에 이어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제2대 CEO를 역임하고 이사회 회장으로 영전했다가, 후임 CEO 마틴 위티그가 지난달 5일 건강 문제로 갑작스레 사임하자 파트너 회의에서 다시 CEO로 선임됐다.

장인(匠人) 문화, 위기에 빛을 발하다

요즘 한국에서 '독일 배우기'가 한창이라고 하자 그는 "양국 다 제조업 기반의 수출 주도형 모델이고 자동차와 전자, 공업 분야에 강한 글로벌 기업을 여럿 갖고 있다"며 "닮은 점이 많아 서로 배울 점도 많다"고 말했다. 새누리당 의원 60여명은 지난 4월부터 매주 목요일 아침 독일 전문가를 초청해 독일의 복지 정책과 중소기업 경쟁력을 공부하고 있다. 야권에서도 5월 국회의원 80여명이 참가해 독일의 경제·통일 모델에서 교훈을 찾는 '혁신과 정의의 나라' 포럼을 발족했다.

독일 배우기는 우리나라만의 현상이 아니다. 일본 닛케이비즈니스는 최신호에서 일본이 안정적 성장 모델로 독일 사례를 배워야 한다고 보도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2010년 '유럽의 성장 엔진 독일'이라는 특집 기사를 발행한 데 이어 이번 달 에 후속편을 준비 중이다. 미국 타임지는같은 해 "유럽을 위기에서 구한 나라는 독일"이라고 보도했다. 셴커 사장은 "세상이 뒤늦게 독일적 가치를 알아보고 있다"며 유럽·미국의 여러 정부와 기업에서 독일식 모델에 관해 조언해 달라는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고 했다.

"영미식 자본주의는 상인(merchant) 문화이지만, 독일 자본주의의 핵심은 장인(匠人·craftsman) 문화입니다. 주주들의 영향력이 강한 상인 자본주의는 단기 수익, 개인의 부, 보너스를 강조하는 반면, 장인 자본주의는 꾸준히 수익을 내는 지속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독일 중소기업의 95%는 가족 소유인데, 이들에게 실적이란 '분기'가 아니라 '세대'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가족 경영인이 자기 대(代)에 왕창 해먹고 물러나서 나 몰라라 할까요. 그들의 수익 모델은 항상 다음 세대, 또 그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는 "한국도 이미 충분히 경쟁력 있는 제조업에 계속해서 집중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최근 세계경제의 주요 트렌드를 살펴보면 앞으로 기후변화, 희귀 원자재 확보, 인구 이동이 가장 강력한 변수가 될 겁니다. 이 변수들에 대응할 가장 좋은 해답은 바로 생산성을 올리는 것입니다. 어떤 돌발 변수가 터진다 해도 생산성을 늘리는 것으로 대응을 꾀할 수 있고, 이는 당연히 제조업이 뒷받침돼야 가능합니다. 더 효율적인 공장을 짓고, 제조 공정 공학을 강화해야 합니다."

분기가 아닌 세대를 생각하라

한국 경제계는 특히 독일 전체 기업의 99%를 차지하는 '미텔슈탄트(Mittelstand·직원 500명 이하, 연매출 5000만 유로 이하 기업)'의 경쟁력에 주목하고 있다. 독일 경제기술부에 따르면 미텔슈탄트가 창출하는 총생산은 독일 경제 규모의 52%이며,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평균 7.7%로 대기업 평균 5.8%보다 오히려 높다. 전체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1%다. 미텔슈탄트는 2010년 1861억유로(약 280조원)를 수출해 독일 전체 수출의 19%를 담당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소기업(300인 이하)이 전체 산업의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6.8%에 달하지만 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50% 안팎에 머물고 있다.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률은 3.1%에 불과하다.

금융 위기가 몰아닥친 2008~2011년 독일 대기업들이 고용을 2.4% 줄인 반면, 전체 노동인구의 99%를 고용하고 있는 미텔슈탄트는 1.6%를 오히려 늘렸다. 직원 수 300~500명 규모의 중견 기업은 독일이 10만개, 한국이 1600개다.

셴커 사장은 그러나 "미텔슈탄트가 경쟁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지속 가능한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란 어렵다"고 말했다. 독일 경제를 지탱하는 힘의 원천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협력과 조화에 있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의 대기업과 중소기업은 연구개발(R&D) 분야에서 협력하며 최고의 시너지를 내고 있다"고 말했다. "시간과 돈을 많이 투자해야 하는 연구 쪽은 대기업이 맡고, 개발은 중소기업이 하는 식이죠. 대기업의 연구 단계에서 나온 좋은 아이디어들을 경쟁력 있는 솔루션으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는 역할은 미텔슈탄트의 몫입니다."

―대기업·중소기업 상생의 비법은 뭡니까.

"독일 문화는 동종 업계 사람들끼리 서로 동업자라 생각하는 '길드(Guild· 중세 유럽의 기능인 조합)' 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대기업에 협력 중소기업은 '자동차의 한 부분'을 만드는 납품 업체에 그치지 않고, 자동차 제조라는 큰 공정의 한 부분을 함께 만들어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또한 정부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중소기업 지원책은 단기적 수익에 집착하지 말고 지속 가능한 성장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한국의 대기업들은 중소기업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일부는 납품 단가 후려치기 등으로 상생을 무색하게 하기도 합니다.

"비즈니스 문화의 차이인 듯합니다. 독일에서도 비슷한 갈등 사례가 10년 전 자동차 업계에서 있었죠. BMW나 포르셰 같은 대기업이 단기 비용 절감이란 목표를 위해 가격 단가 낮추기 압박에 나서자, 납품 업체들과 갈등이 커졌습니다. 여론이 안 좋아지자 대기업들이 먼저 중소기업과 함께하는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했습니다. 양측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비용 절감과 경쟁력 향상에 나선 것이죠. 독일은 가족 경영 기업의 장점 때문에 연구개발에서 중소기업이 오히려 뛰어난 편입니다. 여기에 대기업의 자금력이 보태져 독일 자동차의 경쟁력이 나날이 발전하는 것입니다."

―독일 가족 기업들은 경영권 승계 문제로 물의를 일으키는 일이 없습니까.

"독일에선 5~6대를 넘어선 가족 기업이 10만개도 넘어요. 대부분이 경영권 승계 문제로 고민하는데, 자식들이 서로 가업을 이어받겠다고 싸워서가 아니라 서로 안 하겠다고 빼서 그런 것이죠. 신세대 오너들은 골치 아픈 경영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요즘 중소기업 전문경영인의 주가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차세대 기업인을 교육하는 것은 독일에서도 중요한 이슈입니다. 최근 10년 새 독일 경영대학에서는 '외부인을 위한 가족 기업 경영론' 같은 수업이 늘어났습니다."

노조원이 참여하는 이사회

―독일 경제의 장점으로 이원(二元) 이사회 구조를 꼽기도 합니다.

"독일의 경쟁력에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독일 기업에는 경영이사회와 감독이사회가 있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룹니다. 경영이사회가 전략을 책정하고 감독이사회가 승인하는 형태로 운영되지요. 금융 위기 이후 뒤숭숭한 요즘 같은 때 두 이사회가 있다는 것은 경쟁력에 플러스가 되는 요인입니다. 기업이 어떤 모험을 하기 전에 임원들이 최소한 두 차례 심사숙고하니까요. 요즘 미국 회사들도 독일식 이원 이사회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 경제 조사 기관 콘퍼런스보드가 작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문에 응답한 미국 기업 중 30~40%가 이원 이사회 도입에 긍정적이라고 밝혔어요."

―직원이 500명 이상인 독일 기업에선 노조원이 감독이사회 이사로 참여합니다. 노조원이 경영에 직접 결정권을 행사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노조원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제도를 '미트베슈티뭉(mitbestimmung)'이라 하는데 영어로 '공동 의결(co-determination)'이라 번역해요. 정확히 영어로 표현하는 단어조차 없다는 점에서 이 제도는 매우 독일적인 제도죠. 노조 소속 근로자가 이사회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것은 경영에 큰 도움이 됩니다. 노조원도 직접 기여를 했다는 소속감에 회사 결정을 더 잘 따르게 되고 주인 의식을 갖습니다. 미트베슈티뭉은 특히 경영이 어려운 시기에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임금 동결 등 회사로서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 노조원들이 직접 회사의 경영 상태, 전망을 검토하고 수긍하게 되죠."

―독일 모델은 결정이 느리고 변화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물론 단점은 있습니다. 여기저기 설득해야 할 사람이 많기 때문에 최종 결정까지 속도가 조금 느리죠. 그런데 뒤집어서 생각해 보세요. 결정이 내려진 후엔 일사불란 그 자체입니다. 경영진과 노조원이 모두 합의한 것이기 때문이죠. 오래 심사숙고해서 내린 결정인 만큼 더 좋은 결정일 가능성도 높고요. 미국 모델은 회장과 CEO가 결단해서 속전속결로 움직입니다. 하지만 지금 미국 경제를 보세요. 빠른 결정이 곧 좋은 결정이었던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