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분기 가계부채 1兆7000억원 감소… 사상 최대폭(2003년 통계 작성 이후)

직장인 박성수(39)씨는 지난달 찾은 적금 3000여만원을 주택담보대출을 갚는 데 썼다. 저축을 시작할 때는 목돈을 만들어 배당주에 장기 투자할 계획이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박씨는 "2006년 집을 살 때 1억3000만원을 빌려 원리금 분할 상환을 하고 있는데 이번에 3000만원을 더 갚아 이제 빚이 5000만원으로 줄었다"며 "앞으로 돈이 생기는 대로 빚부터 갚아 부채를 '제로'로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박씨의 집은 2006년 구입 당시 4억5000만원이었다가 7억원 가까이 오른 뒤 현재 시세는 4억6000만원 정도 한다. 명목상 손해를 보지 않았지만, 그동안 들어간 이자 비용이나 대체 투자 기회 상실 등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론 손해를 본 것이다. 박씨는 "자산이 쪼그라든 만큼 부채를 줄여야 앞으로 집값이 더 떨어져도 유지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소득이 생기면 빚부터 갚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한국 경제에 이른바 '대차대조표 불황'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대차대조표는 가계나 기업의 재산 상태를 나타내는 표이다. 집값·주가 등 보유 자산의 가치가 떨어지면서 가계나 기업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우선으로 부채를 줄이는데 이 과정에서 소비와 투자가 위축되고, 이것이 다시 경기침체와 자산 가치의 추가 하락을 가져오는 악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 가계, 부채 감축에 목매다

한국은행은 17일 '1분기 중 자금순환' 자료를 통해 "1분기 말 기준 가계의 차입 금액이 작년 말보다 1조7000억원 감소한 1157조1000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가계의 차입 금액이 감소한 것은 금융위기였던 2009년 1분기 이후 처음으로, 감소폭으론 2003년 통계 작성 후 최대치이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가구 소득은 계속 증가하는데, 소득으로 대출 상환에 나서면서 차입 금액이 감소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빚을 지고 있는 가계로 한정하면 부채 감소세는 이미 지난해부터 시작됐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가계부채를 갖고 있는 가구들의 평균 부채액은 8187만원으로 1년 전보다 1.2% 줄었다. 특히 금융부채액은 3.9% 줄었다. 소득으로 빚을 갚으면서 빚이 줄어든 것이다. 정성태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1분기 가계부채가 감소한 것은 기존 채무자들의 상환액이 새로 빚을 얻는 사람들의 신규 대출액을 앞질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계가 대출 상환에 나선 것은 오랫동안 계속되고 있는 자산 가격 하락 때문이란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국민은행에 따르면 1분기의 전국 평균 집값은 1㎡당 250만원으로 지난해 1분기(259만원) 이후 5분기 연속 하락세를 기록하고 있다. 또 종합주가지수는 17일 1883.1포인트로 연초 2031포인트보다 150포인트 가까이 내려와 있다. 자산이 쪼그라들면 그에 맞춰 부채를 줄이려는 심리가 발동한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대차대조표상으로 자산의 가격이 계속 오르면 부채를 늘려도 상관이 없다고 느끼지만, 자산 가치가 떨어지면 상대적으로 부채가 커 보이기 때문에 부채를 줄이게 된다"고 설명했다.

미국 같은 선진국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주택 가격이 급락하면서 가계가 바로 대차대조표 조정에 나섰다.

반면 한국은 상대적으로 그 충격이 약해 조정의 기회를 갖지 못했고, 그 영향이 이제 나타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는 "한국은 금융위기에도 자산 가격이 어느 정도 유지가 되면서 미국이나 일본 같은 충격을 받지 않았는데, 이제 그 충격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대차대조표 불황의 위험성

대차대조표 맞추기는 비단 가계만의 현상이 아니다. 은행의 설비투자용 기업대출은 지난 4월 기준 227조7068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0.9% 증가하는 데 그쳤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부 정책으로 중소기업 대출이 늘면서 소폭이나마 증가세를 나타냈지만, 대기업 대출은 이미 마이너스”라고 말했다. 가계와 기업이 부채를 줄이는 것은 건전성 개선 측면에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소비와 투자를 위축시킨다는 점에서 전체 경제에는 나쁜 영향을 줄 수 있다. 이 때문에 ‘대차대조표 불황’이란 표현까지 생긴 것이다. 실제 1분기 월평균 가계 소비지출액은 254만원으로 1년 전보다 1% 줄었다.

2009년 1분기(-3.6%) 이후 4년 만의 일이었다. 4월 기업 설비투자도 1년 전보다 12.4% 감소해, 지난해 3월(-1.7%) 이후 14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벌이고 있다. 벌어들인 돈으로 우선 대출 상환에 나서면서 나타난 결과이다.

이 같은 상황이 지속하면 경기 침체가 길어질 수밖에 없다. 대차대조표를 맞추기 위한 부채 축소가 ‘소비·투자 감소→경기 침체 심화→자산 가격 추가 하락→부채 추가 축소→소비·투자 추가 감소→경기 불황’이란 악순환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리처드 쿠 노무라증권 이코노미스트는 그의 저서 ‘대차대조표 불황’에서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은 대차대조표 악순환의 사이클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오정근 고려대 교수는 “한국 경제가 본격적인 대차대조표 불황에 진입하지 않도록 초기에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 경기 침체를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recession)

대차대조표는 자산과 이를 구입하기 위해 투입한 자본 및 부채를 좌우로 나눠 표로 정리한 것이다. 자산 가격이 내려가면 평가 손실을 보면서 자본이 줄고, 결국 부채만 남게 된다. 이를 막기 위해 경제 주체들이 빚을 갚으려는 노력을 하면서, 소비와 투자가 감소해 불황이 생기는 현상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