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3.06.20 03:05 | 수정 : 2013.06.20 10:06

[김창완, 공포 영화 '닥터'에서 생애 첫 주연]

'살인마' 성형외과의사 역할
이 영화로 다 내려놓게 됐지 '착한 사람 콤플렉스' 같은 것
연기 30년… 조연이었기에 가능
꼭 하고 싶은 역할은 '로맨스'… 철없다는 말 이젠 좀 창피해

김성홍 감독의 '닥터'(20일 개봉)를 본 직후에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이 영화의 주연배우인 김창완(59)을 만났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지만 기자는 목에서 말이 걸려 목례만 했다. 영화의 잔상(殘像)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생애 첫 주연을 맡은 김창완은 여성 혐오와 열등감 그리고 광기에 사로잡혀 장모와 아내, 간호사 등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성형외과 의사를 연기했다. 방금 본 영화 속에서 여자를 죽인 뒤 쾌감을 느끼는 듯 슬며시 미소 짓거나 "미친 X"을 되뇌며 방안을 서성이던 그를 처음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긴 힘들었다. 극단적인 설정을 한 이 영화는 장르물이란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야기의 개연성과 디테일이 떨어진다.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악역이다.

"장모님을 그렇게 하는 장면(※스포일러라 밝힐 수 없음)에서 시나리오를 집어던졌다. 너무 힘들어서. 그런데 누군가 공들여 썼을 시나리오를 몇분 만에 던져버린 데 대한 자책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왜 이렇게 이 영화를 불편해하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다. 알고 보니 편견이 많았던 거다. 영화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는 편견 말이다."

―감독은 왜 이런 사이코패스 의사 역할을 당신에게 맡기려 했을까.

"이유는 모르지만 그건 굉장히 불쾌하다. 하필이면 왜 나인가(웃음). 아무래도 나한테 왕자병과 착한 사람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 찍으면서 그런 거 다 내려놨다. 또 영화에 대한 순정을 다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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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은 기자의 실없는 농담에도 '허허' 하는 낮은 웃음소리로 자주 웃다가도 금세 찌푸린 얼굴로“주연은 앵벌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연정 객원기자
―첫 주연이다.

"주연배우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건지 몰랐다. 이런 일인 줄 알았다면 거절했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즐겁게 그릴 수 있다. 그런데 300만원 받을 수 있는 작품을 그려야 한다고 하면 그릴 수가 있겠나. 주연배우가 딱 그 심정이다."

―연기를 배운 적도 없고, 업(業)으로 삼은 것 같지도 않은데 벌써 30년 가까이 했다.

"그게 하고 싶다고 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다들 해달라고 하니까 한 것이다. 재미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하나?

"(목소리를 낮추고) 돈 때문에(웃음). 사실 돈보단 그동안 쭈욱 조연을 했기 때문에 계속할 수 있었다. 음악은 시작할 때부터 주인공이었으니까. 하지만 연기는 파티에 초대받는 심정으로 했다. 계속하다 보니 연기도 조금 늘긴 느는 것 같다."

―앞으로 꼭 해보고 싶은 역할이나 작품이 있나.

"있다. 로맨스. 어떤 것이든 아름다울 것 같다."

―연애도 해보고 결혼도 한 중년들이 왜 로맨스에 애착을 가질까.

"로맨스, 그러니까 로망이란 것은 청춘 같아서 다 지나고 나서야 '아 지나갔구나'라고밖에 알 수 없다. 로망은 지금 만난 뜨거운 사랑이 아니라 가버린 시간과 지나간 계절이다. 그러니 젊은이들은 로망을 모른다."

―많은 일을 힘들지 않게 잘해내는 것 같다. 비결이라도 있나.

"듣고보니 내가 진짜 짜증 나는 캐릭터 같다. 그러니까 영업 비밀을 밝히라는 건가? 난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엔 그저 잘 뿐이다."

―그래서 '소년' '청년'이란 수식어도 달고 사는 것 아닌가.

"술친구들이 꽤 있다. 이런 일도 하고, 저런 일도 하고 시간 남으면 그들과 술 마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이 울타리 밖에 나가서 다른 걸 하고 싶다. 그리고 이젠 철없이 사는 것도 창피하다. 환갑이 다 돼갖고 언제까지 아기처럼 살아야 하나. 물론 아기처럼 사는 게 창작에는 많이 도움이 된다. 그래서 나 몰라라 사는데 언제까지 외면하고 살 수 있을까 싶다. 어제 갑자기 물병에서 '아프리카 어린이를 도웁시다'란 문구를 발견하고서 다 읽어봤다. 300원이면 그렇게 많은 아이를 살릴 수 있다는데 그게 또 신경이 쓰이는 거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 건가.

"'불안한 행복'이란 노래 만들 때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안한 행복'은 1991년 나온 '산울림' 12집에 수록된 노래다. 이 노래를 들으면 김창완이 '사람 좋은 옆집 아저씨'가 아니라 예민하고 치열한 사람이란 것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어쩌면 그가 언뜻언뜻 내비치는 이런 서늘함 때문에 연출자들도 그에게 악역을 맡기는지 모른다. '불안한 행복'의 가사는 이렇다.

'예쁜 아내와 아담한 집과 새로 산 신발/창틀을 긁는 아침햇살 모르는 채 잠들어 있는 내 아이의 포근한 이불(중략)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떨어져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신문을 보아야 한다./앨범도 가끔 보아야 한다./나는 가난했었고/사진 속 내 눈동자는 불안해 보였지./어머니 아버지는 전란을 겪으셨고/ 나의 형은 젖이 모자라 죽었네./그렇게 불안하게 나는 나의 행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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