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렇게 야해도 돼?

#1. 남자는 소설을 읽고 있다. 알몸에 남자 와이셔츠만 걸친 여자가 은근한 눈길을 보내도, 여자가 몸을 만져도 남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관절 무슨 책이길래. 결국 끝까지 보게 된다. 마지막에 눈에 들어오는 소설 제목 '그림자 밟기'.

#2. 지난달 말부터 이달 초까지 지하철 강남역·신촌역 등에서는 정체불명의 카드가 배포됐다. 술집 명함을 빼닮은 이 카드엔 늘씬한 여성의 실루엣과 함께 '소문의 여자'라고 적혀 있다. 광화문·강남의 오피스 빌딩에도 '소문의 여자'라는 스티커가 붙었다. 아무런 설명도 없으니 인터넷 검색창에 '소문의 여자'를 입력할 수밖에.

책 광고가 섹시해진다. 동영상은 7월에 출간될 미야베 미유키의 단편집 '그림자 밟기'(북스피어)를, 카드와 스티커는 오쿠다 히데오의 신작 소설 '소문의 여자'(리더스북)를 홍보하는 장치다. '그림자 밟기' 동영상 속 남자는 이 장르소설을 펴낸 출판사 김홍민 사장이다. 이 사장님은 말한다. "'차~암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라고 말하는 천호식품 광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책에 대한 믿음을 주면서 엄숙하지 않고 섹시한 광고 좀 해보고 싶었다"고.

◇띠지보다 싼 광고?

책 2000부에 띠지를 두르는 데 드는 비용은 20만원. 북스피어의 섹시한 책 광고는 촬영장 구하는 데 10만원을 쓰고, 나머지는 자원봉사로 해결했다. 김홍민 사장은 지난 3월 북스피어 소식지에 섹시 광고 1탄을 실은 적이 있다. 반라(半裸)의 여성이 무릎에 누워 있는데도 소설 '눈의 아이'에 몰입한 풍경. 이들 뒤로 벌겋게 '그거보다 재밌다'고 적혀 있었다.

이번엔 파급력이 더 센 동영상이다. 독자는 7월 초 나올 이 출판사의 앱 '르 지라시'에서 '그림자 밟기' 광고 영상(20초)을 볼 수 있다. 촬영을 위해 2주간 저녁을 거르고 운동으로 식스팩도 만들었다는 김 사장은 "기존 책 광고는 너무 진지하고 심심하다. 내가 직접 출연하면서 독자와 함께 '놀고' 싶었다"고 말했다.

오쿠다 히데오 소설 '소문의 여자'는 제목만 노출하는 방식으로 신비주의 마케팅을 했다. 이 책은 여성의 섹시한 뒤태로 표지를 디자인했다. 리더스북 박희연 대표는 "온라인 서점에서 '소문의 여자'가 검색어 순위 10위 안에 들고 판매 성적도 괜찮다"면서 "소설이 겨냥한 독자인 20~30대에 어필했다는 점에서 성공했다"고 자평했다.

◇섹시하면 더 팔린다

인간의 뇌는 몇몇 원시적 충동에 민감하다. 대표적인 것이 음식과 번식. 1885년 에로틱한 여성 이미지를 넣은 비누 광고가 성공한 이후 섹시한 광고는 술, 패션, 향수, 자동차업계에서 100년 넘게 상품 판매의 중요한 도구가 됐다.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성적인 광고는 훨씬 더 뻔뻔해졌다.

그리고 이번엔 책이다. 박범신의 '은교', 임경선의 '어떤 날 그녀들이', 알랭 드 보통의 '우리는 사랑일까', 넬레 노이하우스의 '사랑받지 못한 여자', 일레인 사이올리노의 '프랑스 남자들은 뒷모습에 주목한다'…. 디자인은 점점 야해지고 있다. 출판계에서는 "신선하고 흥미로운 시도"라는 호평과 "격이 떨어지고 선정성에 기대려는 발상"이라는 비판이 엇갈린다. 불황 속 책의 몸부림 현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