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500m밑 가스·원유개발, 채굴·분리·이송하는 산업… 2020년엔 1307억달러 규모 美·유럽 몇몇 업체가 점령, 일본은 수백억엔 예산 투입… 한국, 국가적 차원 투자해야
우리나라는 흔히 해양 플랜트 강국(强國)으로 불린다. 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대우조선해양 등 세계 3대 조선업체가 전 세계적으로 발주되는 드릴십(선박처럼 생긴 시추선) 등의 수주를 싹쓸이하다시피 한다.
사실 해양 플랜트 강국이란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한국이 드릴십·FPSO(부유식 원유 생산·저장·하역 설비) 등 해상 부유식 플랫폼(해상 플랫폼) 분야에서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수면 밑에 설치돼 원유·가스 생산에 이용되는 채굴·분리·이송 설비 분야에선 아직 초보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해수면 밑에 설치되는 채굴·분리·이송 설비는 보통 '서브시(Subsea)'로 불린다.
◇심해 유전 개발로 서브시 시장 폭발적 성장
해양 플랜트는 크게 해상 플랫폼과 서브시 두 부문으로 나뉜다. 시장 규모는 서브시가 현재 두 배 가까이 크다. 지난해 기준으로 세계 해상 플랫폼 시장 규모는 연간 152억달러(약 17조원), 서브시 시장은 280억달러(약 31조원)였다. 2020년이 되면 서브시 시장은 1307억달러로 커지는 반면, 해상 플랫폼 시장은 508억달러에 머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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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시 시장의 급성장은 육상(陸上)·천해(淺海)에 매장된 에너지 자원 고갈로 수심 500m 이상의 심해(深海)에 위치한 유정(油井) 개발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에너지 전문가들은 세계 석유 매장량의 30% 이상인 1조6000만배럴이 해양에 매장돼 있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유가 급등과 원유 시추 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 발견되는 원유와 가스 유정의 평균 수심은 1990년대 초반 수심 200m 안팎에서 2000년대 후반 1000m로 깊어졌다. 최근 들어선 수심 3000m 안팎의 심해 유정 개발에도 성공한 상태다. 2015년에는 심해 유정 비중이 개발 중인 전체 유정의 80% 수준까지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미국·유럽 소수 업체, 시장 과점
서브시는 기술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시장이다. 서브시 설치나 공급 능력을 갖춘 업체는 사이펨·FMC ·테크닉·웨더포드 등 유럽과 미국에서 손으로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심해에 설치되는 만큼 안정성이 검증된 장비가 아니면 자칫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심이 3000m까지 내려가면 수온은 0도 가까이로 내려가고 수압은 대기보다 300배 이상 높아진다.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10년 이상 정상 작동하는 장비를 만드는 것은 기술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브시는 크게 바닷속 지표면인 해상(海床)에 설치되는 해저 생산처리 설비, 해상 플랫폼과 생산처리 설비를 연결하는 파이프·케이블인 URF(엄빌리컬·라이저·플로라인)로 분류할 수 있다.
해저 생산처리 설비로는 유정에서 나오는 탄화수소(원유·가스)의 양을 제어하는 크리스마스 트리, 크리스마스 트리에서 이송된 탄화수소를 모으고 해상으로 쏘아올리는 매니폴드(Manifold), 원유·가스·물을 1차 분리하는 분리기 등이 있다. URF는 해상 플랫폼과 매니폴드를 연결해 전력이나 유압 등을 제어하는 케이블인 엄빌리컬, 해상 플랫폼으로 탄화수소가 이동하는 통로인 라이저, 크리스마스 트리와 매니폴드를 연결하는 플로라인(Flowline)을 각각 일컫는 말이다.
셸이 2000년대 초 1000~1200m 수심의 나이지리아 봉가 필드에서 진행한 유전 개발 프로젝트엔 크리스마스 트리 46개, 매니폴드 5개, FPSO 1기가 동원됐고, 236㎞ 길이의 URF가 설치됐다. 심해 유전 개발이 얼마나 늘어날지를 판단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트리 수요는 2011년 350여개에서 2015년 826개로 늘어날 전망이다. 크리스마스 트리는 FMC·캐머런·아커솔루션·GE·드릴큅 5개 업체가 세계 시장 전체를 점유하고 있다.
◇서브시 시장 치열한 경쟁
심해 유전 개발은 현재 산유국의 세력 판도를 바꾸고 있다. 석유·가스를 생산하는 해역이 멕시코만·북해 등에서 아프리카·호주·브라질·극지 등으로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각국은 심해 유전 개발을 통한 주도권 확보를 위해 해양 플랜트 육성에 적극 나서고 있다.
미국은 대형 석유업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개념의 해양 플랜트와 서브시 플랜트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해양 플랜트 기술 업체도 심해저 플랜트 엔지니어링에 대한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 노력하고 있다. 브라질은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로 서브시 플랜트 자체 기술 확보에 나서고 있으며, 일본도 국가적으로 연간 수백억엔의 예산을 투입해 심해저 플랜트 개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절대적 우위를 차지하는 해상 플랫폼 분야와 달리, 서브시 분야엔 아직 진출조차 못한 상태다. 한국기계연구원 박상진 박사는 "서브시 분야에서 경쟁력을 쌓으려면 단기간에 집중적인 투자가 필요하다"면서 "정부가 서브시 분야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해외 유정 확보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서브시(Subsea 심해저 시스템)
심해저에 매장된 석유와 가스를 채굴·이송하는 플랜트. 해저 생산 처리 시스템과 이를 연결하는 UR F(엄빌리컬·라이저·플로라인)로 구성된다.
☞크리스마스트리
원유를 뽑아올리는 무게 40t, 가로 3m, 세로 4m, 높이 10m의 철 구조물. 원래 '서브시 트리'로 불렸으나 외형이 성탄절 트리를 닮았다는 이유로 '크리스마스 트리'라고 주로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