商高 졸업, 주류업계서 非주류로 성공한 밑천 됐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나는 '순고' 출신이다. 지역 명문인 순천고 출신이란 뜻은 아니다. 대학은 근처에도 못 가봤기에 '순수 고졸'이란 의미로 나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곤 한다. 처음 만난 이도 뜻풀이를 해 드리면 한바탕 웃고 나서 이내 마음을 활짝 연다. 이런 나에게 사람들은 '고신영달(고졸 신화 영업 달인)'이란 과분한 별명까지 붙여주었다. 고졸 학력이 자랑일 순 없겠지만, 누구나 노력하면 학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는 본보기로 자주 인용해주시니 내심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만 해도 학력 콤플렉스가 있었다. 1980년 주류 회사에 공채로 입사할 때 동기 중에는 명문대 졸업에 석·박사 출신도 많았다. 나는 상고 졸업장 하나만 달랑 갖고 있었다.

고졸이라는 이유로 대졸 동기들보다 급여나 승진에서도 차별을 받았다. 대졸 동기들보다 4년 정도 늦게 주임으로 진급했을 뿐 아니라, '을주임(고졸 주임)'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녔다. 노력에 대해 정당한 보상을 못 받는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고 대학을 안 간, 아니 못 간 나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대학교에 가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고 운동(태권도)만 열심히 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됐다. 한국 사회는 엄연한 학력 사회였다. 동기들한테 주눅이 들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뿐 아니었다. 콤플렉스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그것도 가장 솔직했어야 할 자식들에게. 아이들이 학기 초에 가족관계조사서라는 걸 들고 오면 부모 학력란에 습관적으로 '대졸'로 적어냈다. 아이들한테까지 학력을 드러내기가 정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직장에서는 학력이 공개돼 있어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가 없었지만 정작 집에서는 가장 소중한 가족을 속이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점점 학력 콤플렉스가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여러 부류의 사람을 많이 만나는 영업일을 했다는 점도 변화의 한 이유였는지 모른다. 당시 만났던 술 도매사 분들은 학력이 높은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사업을 하는 위치까지 오른 사장님도 많았다. 이런 분들은 내 학력을 솔직하게 얘기하면 오히려 편하게 대해 줬다. 살갑게 대해주는 그분들을 보며, 나를 솔직히 드러내면 상대도 마음을 연다는 것을 깨달았다. 제품보다는 나를 먼저 팔아야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점도 알게 됐다.

자신감이 생겼고, 그래서 용기를 냈다. 큰딸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던 해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앞에 가족관계조사서를 놓았다.

"사실 아빠는 대학을 못 나왔다. 최종 학력이 고졸이다. 그동안 너희한테 솔직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고졸'로 적어낼 테니 커서 아빠처럼 창피 안 당하려면 공부 열심히 해라."

사람은 정직해야 한다고 아이들한테 입버릇처럼 얘기하면서 정작 거짓말을 해온 나 자신이 참담했다. 그러나 속 시원히 털어놓고 나니 홀가분했다.

가식을 벗어던지고 난 뒤에는 전보다 더 뛰었다. 남들보다 더 긴장하고 더 땀을 흘렸다. 다른 동기들이 45도로 인사하면 나는 90도로 인사했다. 동료가 5~6개 거래처를 담당할 때 혼자서 19개 거래처를 맡았다. 매일 포니 자동차로 200㎞ 이상을 달렸다. 경쟁사 직원들이 대보름에 거래처로 부럼을 보내면 오곡밥을 지어 찾아갔다. 경쟁사 직원이 거래처 경조사에 조의금만 보낼 때, 장례식장에 가서 팔을 걷어붙이고 음식을 나르고 발인까지 챙겼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식량과 곡식이 귀했다. 그래서 정부는 소주 생산량을 일정 수준으로 통제하기 위해 제조업체별로 소주의 원료인 주정 공급량을 제한하는 '주정 배정제'를 시행했다. 수요보다 생산이 부족하니, 영업 사원은 큰 도매사하고만 거래해도 좋은 실적을 올렸다. 그러나 나는 일반 식당들까지 찾아다니며 '바닥 영업'을 했다.

요즘 하는 말로 화려한 '스펙'을 갖췄다면 그렇게 발품 팔며 뛰어다니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졸업장이 인생의 목표일 수는 없다는 생각도 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남보다 한 발이라도 더 뛰어 채워나가면 된다. 사회생활은 한순간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100미터 단거리 경주가 아니니 쉽게 지치거나 포기할 이유도 없었다.

태권도 도복을 여미는 띠는 흰 띠에서 출발한다. 다음엔 노란 띠, 파란 띠, 빨간 띠, 검은 띠를 차례차례 따게 되는데 내가 운동할 때는 띠를 버리지 않고 층층이 다 덧댔다. 한 단계, 한 단계 밟아온 흔적을 늘 되새기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얼마 전 주위 사람들에게 등을 떠밀려 난생처음 대학 강단에 설 기회가 있었다. 서울대 경제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33년 영업 철학을 소개하는 시간이었다. 순수 고졸, '순고' 출신이 대한민국 최고 학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한다는 게 내가 생각해도 역설처럼 느껴졌다. 마침 강의를 한 날은 생전에 내가 대학을 가기를 그토록 바랐던 아버지의 기일이었다. 그날만큼은 하늘에서 아버지가 아들의 모습을 보고 함박웃음을 짓고 계실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