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석아, 내 노래 듣고 있니

1988년은 한국 대중음악 스펙트럼이 바퀴살처럼 방사형(放射形)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한 해다. 그때 바퀴살 하나가 동물원이다. '거리에서', '변해가네',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시청 앞 지하철 역에서', '널 사랑하겠어' 같은 곡들은 사랑을 노래했지만 타령조로 들리지 않았다. 6·10 항쟁을 정점으로 운동가요는 대학가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82학번 동기들로 이뤄진 이 그룹의 인기는 김광석이란 명창(名唱) 덕을 많이 봤지만 그 뒤에는 히트곡을 써낸 김창기가 있었다.

올해 쉰 살이 된 김창기가 두 번째 독집 '내 머리속의 가시'를 발표하고 오는 19~21일 서울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 무대에 선다. 지난 2000년 첫 앨범 '하강의 미학' 이후 13년 만이다.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97년 7집을 낸 뒤 동물원을 탈퇴하고 99년에 신경정신과 의원을 개업했다. 지난 30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음반 기획사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공부 잘하는 개구쟁이 얼굴이었으나 조금씩 주름이 생기고 있었다.

"새 앨범은 일종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좋은 노래 만들어보고 싶은데 용기가 없어서 못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5학년생인 딸이 '아빠는 왜 더 이상 노래를 만들지 않느냐'고 해요. 그래서 용기를 낸 거예요."

동물원 시절 김창기는 뛰어난 작곡가였으나 다른 멤버보다 노래가 딸렸다. 이번 앨범 역시 가수로서 새로운 모습은 없다. 그러나 일기처럼 편지처럼 조곤조곤 '했어' 투로 쓴 노랫말은 여전하다. 여러 번 듣다 보니 그의 노래는 오랜 친구가 보내온 음악 편지 같다.

첫 곡은 '광석이에게'다. 그는 1집 수록곡 '나에게 남겨진 너의 의미'에서도 김광석을 노래했는데, 이번엔 좀 더 격정적이다. "단골집 이모가 제발 싸움은/ 밖에 나가 하라고 하기에/ 우린 밖으로 뛰쳐나가/ 우리가 여기에 있다고 고함쳤지"라고 추억하고 "네가 날 떠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없었어" 하고 후렴을 부른다. 노래가 너무 뜨거워 델 것 같다.

"대학교 2, 3학년 때 풍경이죠. 신촌이나 종로에서 어울리던 때의 모습이에요. 소주 한 병에 500원 하던 때 김치찌개에 계속 물 부어 안주로 먹던 시절이죠. 김광석이란 친구를 잃어버린 나의 상실과 부정, 분노, 우울을 한 편의 모노드라마처럼 만든 앨범이에요."

그 말처럼 김창기의 신곡 가사들은 제법 과격하다. "움켜쥔 이 주먹을/ 누군가에게 휘두르고 싶어"(눈사람), "당분간 내 상처를 핥는 역할을 하겠어"(난 그냥 이대로 있겠어!)라고 하더니 급기야 "이런 우라질! 오, 이제 와서 무슨 짓이냐고"(지혜와 용기)라고 탄식한다. 그는 "몇몇 노래 가사는 환자들의 말에서 영감을 얻기도 했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설득하는 노래는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후렴구도 일부러 뺐어요. 그런 노래는 천박하게 느껴졌거든요. 그랬더니 노래 만드는 게 너무 어려웠어요."

무엇이 14년간 안정적으로 살아온 서울 도곡동 개업의를 이렇게 움직였을까. "나는 누구로, 어떤 사람으로 남겨질까에 대해 오래 고민했어요. 아마도 의사로 편하고 평탄하게 살았으니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좀 더 좋은 노래를 꼭 만들어보고 싶었다는 게 솔직한 대답일 거예요."

그는 음반 속지에서 '10여년간 스티브 블래스 증후군을 앓았다'고 했다. 메이저리그 투수 스티브 블래스가 어느 날 갑자기 스트라이크를 던질 수 없게 돼 그 길로 퇴출당한 것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앨범으로 그는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공포증에서 벗어났을까. 곧 열릴 그의 단독 공연에서 최종 진단이 나올 것 같다. 문의 (02)763-8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