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C(여의도 국제금융센터) 건물 텅 비고, HSBC(유럽 최대 은행) 떠나고 … 한국 금융시장 인기 식어가나

금요일인 지난 5일 저녁 서울 여의도 IFC(국제금융센터) 일대. 세계적인 금융허브를 구축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에 따라 지어진 IFC 건물 3개 동 가운데 불이 켜진 건물은 가장 먼저 지어진 1동(32층)뿐이었다. 작년 11월 완공된 3동(55층)은 입주 희망 기업이 아직 한 곳도 없어 문이 닫힌 채 어둠에 휩싸여 있다. 3동과 함께 완공된 2동도 임대율이 38%에 그쳐 건물 대부분이 텅 비어 있는 상태다.

입주 회사들을 겨우 채운 1동도 전자회사(소니)나 건축자재회사(LG하우시스)에 담배회사(필립 모리스)까지 끌어모아 간신히 공실(空室)을 면했다. 국제금융센터라는 이름에 걸맞은 외국계 대형 금융회사는 한 곳도 없다. 익명을 요구한 외국계 증권사 서울 지점장은 "홍콩에 있는 국제금융센터는 스위스 최대은행인 UBS가 최근 임대계약을 2019년까지로 연장하는 등 불야성을 이룬다"면서 "텅 빈 국제금융센터는 외국 금융회사로부터 외면받는 한국 금융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말했다.

◇외국 금융회사 한국 탈출 러시

외국 금융회사들은 국내에 좀처럼 진출하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기존에 있던 회사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있다. 지난 5일 유럽 최대은행인 HSBC는 국내 지점 11개 중 10개를 폐쇄하고 개인금융 사업을 접기로 결정했다. 2001년 이후 국내에서 철수한 외국계 은행으로는 8번째다. 그동안 일본 아사히, 미국 하와이·캘리포니아유니언, 호주 내쇼날호주, 중동의 아랍은행 등이 한국을 떠났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국내에서 영업하던 해외 은행은 46개였지만 작년에는 39개로 줄었다.

탈(脫)한국 러시는 은행만의 얘기가 아니다. 네덜란드 보험회사 ING는 우리나라에서 철수하기 위해 한국법인을 동양생명에 파는 절차를 진행 중이다. 영국 보험사 아비바도 우리아비바생명의 지분을 팔고 한국 내 사업을 접을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지난해 11월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이 2007년 한국 시장에 진출한 지 5년 만에 철수를 선언했다. AIG도 아시아·태평양본부를 한국에 두려던 계획을 백지화했다.

외국계 금융사의 탈출로 우리 경제는 번듯한(decent) 일자리를 잃고 있다. 당장 HSBC에서 근무하던 직원 중 240여명이 명예퇴직을 당하고 길거리로 나오게 됐다.

하반기부터 본격화될 우리금융 민영화에도 외국계 금융사들의 참여가 저조할 것으로 금융 당국은 우려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외국계 은행장은 "은행 간 과당경쟁으로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금융 당국은 과도한 규제로 은행이 숨을 못 쉬게 하는데 어떤 외국계 은행이 선뜻 국내 은행을 인수하겠다고 나서겠느냐"고 말했다.

◇급격히 떨어지는 국내 은행 수익

한국 금융이 버림받는 주된 이유는 금융시장이 낙후돼 수익성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국내 은행권은 담보를 잡고 돈을 빌려주는 손쉬운 이자 장사에 치중하고 있어 저금리를 맞으면 수익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금융 당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서민금융 대출 확대와 수수료 인하 등 은행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며 수익성 하락을 부채질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인 2007년 은행권의 전체 순이익은 15조원에 달했지만 지난해는 8조7000억원으로 거의 반 토막 났다.

국내 은행들의 낮은 수익성은 외국 은행들과 비교할 때 더욱 초라하다. 지난해 국내 17개 시중은행의 평균 자기자본순이익률(ROE·자본 대비 이익 규모를 뜻하는 수익성 지표)은 6.41%로서 중국 4대 은행(공상·건설·농업·중국은행) 평균인 21%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수익이 떨어져 고민이라는 미국 4대 은행(웰스파고·BOA·시티·JP모건체이스)도 7.3%로 국내 은행보다 높다. 주재성 전 금감원 부원장은 "글로벌 금융회사들이 군살 빼기에 들어가면서 수익성이 낮은 국가의 지점을 먼저 없애다 보니 한국이 최우선 표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은 국내 금융권의 책임도 크다. 좁은 내수시장에만 안주하면서 해외 진출 등 수익원 다변화에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금융회사들은 1960년대부터 해외 진출에 나섰지만 해외 부문의 자산 규모나 수익 창출 능력은 글로벌 금융회사와 비교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금감원에 따르면, 지난해 총자산 중 해외점포의 자산은 은행 3.9%, 증권 0.7%, 생명보험사 0.1%였다. 반면 글로벌 금융회사인 BNP 파리바나 HSBC의 해외 자산 비중은 48%에 달했다. 또 국내 은행권의 전체 이익에서 해외 점포가 차지하는 비중도 7.1%에 불과해 HSBC(83%)의 10%도 안 된다. 서병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금융산업은 단순한 사업구조를 갖추고 있고 회사 간에 차별성이 없어 경기 변동과 같은 일시적인 원인에 따라 수익이 요동치기 때문에 해외에서 보면 예측 가능성이 떨어지고 위험성이 높다"고 말했다.

박병원 은행연합회장은 "금융산업이 경쟁력을 잃으면 결국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금융 본연의 기능마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면서 "금융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정부 차원의 대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