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최보윤 기자의 交感(교감)] "너 마부 안 시킬란다, 고등학교 가자"… 無學의 어머니는 아들 위해 유치장도 마다 안 했다

어머니 손은 성할 날이 없었다. 막노동에 철공소 일에, 봇짐장수 뭐 안 해본 게 없었다. 밥 먹는 게 급급했던 시절, 맏아들을 고등학교 한번 보내보겠다고 닥치는 대로 일하다 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미안하다'고 했다. 재작년 눈 감기 직전까지도 그랬다. '미안하다. 미안해. 널 고등학교까지밖에 못 보내서. 힘이 있었다면 더 가르쳤을 텐데…. 내 배움이 없어 더 못 해줬다. 부모로서 참으로 아쉽고 미안하다.'

"참 대단한 아지매였지…." 최근 만난 재일교포 사업가 겸 미술 컬렉터 하정웅(74)씨는 "내 어머니, 참으로 보고 싶소"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 어려운 시절, 어머니가 없었다면 우리 다섯 남매 모두 고등학교까지 졸업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을 거지요네~."

하정웅 씨는 지난 1939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2세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인 아버지 하헌식씨와 같은 고향 출신인 김윤금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둘 다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본행을 택했다고 했다. 일본식 억양이 상당히 강한 하정웅씨였지만 우리말은 능숙했다. 현재 일본 도쿄 사이타마 등지에 건물 여덟 채를 보유한 사업가로 성장한 하씨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수천억원대에 이르는 작품을 조국에 기증했다. "어머니가 가르쳐준 거니까. 받은 건 두 배로 돌려줘야 한다고." 젊은 날 영양실조로 석 달간 실명(失明)도 하고 어수룩하게 사기도 몇 번 당했지만 버틸 수 있었던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힘들 때마다 어머니는 말씀하셨어. '지금 햇빛이 닿지 않는다고 슬퍼 마라, 울지 마라, 원망 마라. 반드시 빛나는 날이 있으니 참아라.'"

◇"아들아 넌 배워야 한다."

1920년생인 어머니 김윤금씨는 열여덟 살 때쯤 혈혈단신 현해탄을 건넜다. '일본에서 사업 크게 하는 남자가 있다. 밥 먹고 사는 데 걱정 없을 거다'라는 중신의 말에 인생을 건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보고 결혼했다. 그만큼 배가 고팠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딴판이었다. 막노동꾼으로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할 정도의 남자는 그나마 번 돈도 술로 탕진했다. 결혼하자마자 생긴 아들이 아니었다면 그 길로 집을 박차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가난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어머니는 산나물 캐다 굴러 떨어져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도 봇짐을 한가득 들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발톱이 다 빠질 때까지 장사를 다녔다. 일당 200엔짜리 막노동의 고통에 밤마다 옅은 신음을 냈다. "먹고사는 것도 급했지만 '아이들 학교는 보내겠다'는 의지가 어머니를 버티게 한 거지. 어느 날 어머니가 날 붙잡고 흐느끼는 거요. '노래를 부르고 싶어도 노래책을 읽을 수가 없구나…. 맹인이 돼 눈이 안 보이는 심정이다.' 그러면서 '배워야 한다. 배워야 한다'를 수십 번 반복하시는데…."

어머니는 무학(無學)이었다. 소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아이들만큼은 자기가 겪었던 고통을 물려받지 않길 바라신 거지. 선생님이 가정 방문이라도 오시는 날이면 어머니는 고구마 감자를 한 바구니씩 들려 보내시는 거라. 우리 먹을 것도 없을 때였는데…."

◇'더 배우라'며 눈물 흘리던 일본인 선생님 말씀에…

하정웅씨는 아키타에 있는 중학교 졸업 즘엔 마부였던 아버지를 따라 마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학교에도 '고등학교는 포기하겠다'고 말했다. 반에서 1~2등을 도맡을 정도로 영특했던 그였지만 그들 살림에 학비는 너무나 큰 부담이었다. "중 3 여름방학 마치고서인가. 당시 사회과를 맡았던 나카지마 쇼지로라는 선생이 나를 교실로 불러요. 우리 반 담임도 아니었던 터라 의아했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씀하는 거예요. '내 말 잘 들어주라. 노동하겠다는 거 알겠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꼭 가주길 바란다. 배워야 네 앞에 길이 열린다.'"

그날 저녁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의 눈이 그렁그렁해졌다. "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말해요.'미안하다. 미안하다. 내가 네 선생만큼도 안 되는 사람이었구나. 나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을…. 마부 같은 거 죽어도 안 시킬란다. 고등학교 가자.'"

전후(戰後) 일본은 가난했다. 재일교포의 삶만 팍팍한 게 아니었다.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당시 한 반 50명 중 10명 정도만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재일교포 중에선 그가 유일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야미(암거래) 쌀 장사를 시작했다. 벌이는 좋았지만 '불법'이었다. 경찰서에도 두어 번 붙잡혀 들어갔다. 한 달간 소식이 없던 적도 있었다. 아들은 야미꾼들에게 물어물어 드디어 어머니를 찾았다. 도쿄 아카바네 경찰서에 수감돼 있었다. "세상에나 내 어머니 얼굴이 그리 무서운지 처음 알았어. 볼살 하나 없고, 눈도 퀭하고 시체 얼굴이 따로 없었어. 한 달간 신분도 안 밝히고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거래했는지 입을 꽉 닫은 거지. 거래처 보호한다고, 밥도 안 먹고 투쟁한 거야. 보통 여자 기질이 아니었지. 그때 어미를 보며 생각했지. 남을 지켜야 한다면 어떤 이유가 있어도 지켜줘야 한다는 것을. 그런 사명감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자살 시도도 해학으로 바꿔버린 어머니

그런 강단 있는 어머니 입에서 '죽어버리겠다'는 말이 튀어나온 적이 있다. 맏아들 정웅이 초등학생때였다. 그것도 세 번이나. 술에 찌들어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더는 두고 보지 못해서였다. 어느 겨울날 어머니는 어린 아들 정웅의 손을 잡고 길을 떠났다. "선로를 덮은 살얼음 때문에 둘 다 번갈아 가며 미끄러져 자빠졌지.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나중에 서로 데굴데굴 구르며 웃었다니까."

얼마 뒤 어머니는 또 아들을 데리고 나섰다. 철교(鐵橋) 한가운데 선 어머니는 정말 강물에 뛰어들 듯 비장한 표정이었다. 그러던 어머니 입에서 어느새 "아름답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달님이 저렇게 아름다운 것이었다니. 강은 흘러도 달은 움직이지 않는구나!"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정웅아. 너도 저 달님을 잘 보렴. 강물에 비친 모습은 흐트러질 순 있어도 하늘의 저 모습은 변함이 없잖아. 아무리 주변에서 괴롭히려 해도 너만 똑바르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어. 강하고 아름답게 살자." 하정웅 씨는 "어머니 속마음으론 전혀 죽고 싶은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며 "그냥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 집을 나왔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받은 건 두세 배로 갚아라"

어머니는 그의 인생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들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었다. 아키타 공업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향해 처음으로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일본인도 못한 걸 너는 했다. 지금부터가 네 인생의 출발점이라 생각해라." 어머니는 울고 있었다. 굶어 죽고 싶지 않아 택한 일본행이었다.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을 거란 고향 부모 생각에 돌아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하정웅씨는 "막다른 골목이라 생각했던 이곳에서 아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살아가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랬던 어머니가 단 한 번 이해가 안 됐던 때가 있었다. 하정웅씨가 소학교(초등학교) 때였다. 어머니가 꼬아 만든 짚신을 신고 학교에 다녔다. "이게 비 오고 눈이 오면 다 젖어버리는 거라. 일본 나막신(게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거라. 엄마한테 졸랐지. 그게 통했는지 게다를 두 켤레 사오신 거예요. 틀림없이 그중 하나는 나를 위해 사왔다 생각했지. 얼마나 들뜨고 좋았던지…."

하지만 그의 생각이 틀렸다. 옆집에 두 켤레 다 내 준 것이다. 일 나간 동안에 다섯 남매를 자주 봐주던 옆집에 우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항상 부족하게 살던 당신이었는데도, 주변에 감사하고 받은 건 꼭 갚아야 한다셨지. 간장 소금이 모자라 옆집에 빌리고선 나중에 꼭 두 배 세 배로 갚던 분이었어." 어머니는 "일본이라도 갚을수록 더 인정받는다"고 말했다. 하씨가 조국에 미술 작품을 기증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인정을 실천하고 싶어서였다.

그 어렵던 집안 살림도 1960년대 접어들면서 피기 시작했다. 하정웅 씨가 사기(詐欺)에 걸려 떠맡았던 가전 양판점이 그야말로 '대박'을 친 것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이후 컬러 TV가 큰 인기를 끌면서 양판점은 한 달에 2000만~3000만엔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 "어머니는 신용이 가장 중요하다 했지. 야미 장사로 경찰에 붙잡혀도 끝까지 사람들을 보호했어. 나도 내 손님은 끝까지 책임지자 했지. AS 전문인 3명을 고용해 어떤 물건이 와도 끝까지 고쳐줬어. 시작한 지 몇 달 안 돼 '가와모토(하정웅씨 일본 이름) 가게에서 사라. 물건 좋다'는 소문이 도쿄 전체에 퍼졌지."

5년쯤 뒤 그렇게 모은 돈으로 부동산업을 시작했다. 2억엔을 투자해 도심의 땅을 사들이고 건물을 지었다. 당시 하정웅씨의 몸이 너무 안 좋았던 터라, 자녀에게 '임대업'이라는 터전을 마련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랬던 땅값이 수십 배로 뛰었다. 다나카 총리의 '일본개조운동' 덕분이었다.

그는 거부(巨富)가 됐다. 어머니에게 "이제는 쉬라"고 말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불고기집을 해보고 싶다"며 오히려 아들을 설득했다. 아들에게 손 벌리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어머니는 마흔이 넘어 칠순이 될 때까지 도쿄에서 불고기 장사를 했다.

"어머니는 혼자 그렇게 노래를 많이 지어 부르셨어. '나는 잡초다. 나는 잡초다. 길거리 풀이다. 하찮다 밟지 마라. 나는 질기다.' 노인정에서 어깨를 덩실덩실 거리며 춤을 추시는데…."

하씨는 "남들은 부모가 못 배웠다 하면, 무식하다 하면 창피해 하는데 난 너무나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생존력이랄까, 정신력이랄까, 그 민족심은, 그 인간성은 우리 핏줄에 새겨져 있고, 우리 어머니는 그를 몸으로 표현하셨어. 그런 어머니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