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人] "은퇴한 지 33년… 난 지금도 매트가 좋다"

양정모(60)씨 머리엔 하얀 서리가 내렸고, 페더급(62㎏)이던 체중은 웰터급(75㎏)으로 불었다.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건국 이후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게 37년 전 얘기다. 현역에서 은퇴한 지 33년, 지도자 생활을 접은 지도 15년이 지났다.

여전히 몸매는 다부졌지만 흑백TV 속 날렵한 스물셋 청년의 모습은 찾기 어려웠다. 뭉개진 귓바퀴만이 과거의 영광을 말해줬다.

한동안 양씨는 레슬링계를 완전히 떠났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감독을 맡고 있던 조폐공사 레슬링팀이 1998년 외환 위기 여파로 해체됐던 것이다. 이후 그는 아마추어 사진작가의 길을 택했다. 고향 부산의 상징인 갈매기를 찍으러 다녔다.

"대회 나가면 신문에 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까. 시합하는 순간은 금방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그걸 찍어 놓으면 영원히 간직할 수 있잖아요."

양씨는 자신이 찍은 갈매기 사진을 박근혜 대통령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의원 하실 적에 몇 차례 뵐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전달했죠. 사진 제목은 '바람'이었어요."

박 대통령과의 인연은 1976년 8월 19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메달을 따고 귀국하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양씨와 레슬링 대표팀 정동구 코치 등을 청와대로 부른 것이다. "그때 처음 봤습니다. 저랑 한 살 차이더라고요. 그날 박정희 전 대통령은 '모스크바올림픽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도록 열심히 하라'고 했죠. 서방권의 보이콧으로 참가하진 못했지만요."

이 자리에서 양씨와 정 코치가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계속 따려면 체육대학이 꼭 필요하다"고 건의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박 전 대통령이 이 건의를 즉석에서 받아들이면서 이듬해 3월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산실인 한국체육대학이 개교했다. 양궁 핸드볼 사격 역도 레슬링 펜싱 체조 등 '비인기 종목'을 집중 육성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다.

36년간 한국체대 출신들이 따낸 동·하계 올림픽 메달은 금 38개, 은 29개, 동 22개다. 같은 기간 한국이 획득한 전체 올림픽 메달(270개)의 33%에 해당한다. '한국 스포츠사(史)는 양정모의 금메달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닌 셈이다.

야인(野人)으로 살던 양씨는 작년 잠시 친정인 레슬링계로 돌아온 적이 있다. 한국 레슬링이 2008년 베이징올림픽과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연속 '노 골드'를 기록하자 김혜진 당시 레슬링협회장이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특별대책위를 구성해 친구인 양씨에게 위원장직을 맡긴 것이다. 주위의 기대에 양씨는 8년 만의 올림픽 금메달(그레코로만형 66㎏급 김현우)로 화답했다. '노병(老兵)은 죽지 않았다'는 말이 나왔다.

요즘 양씨의 직함은 '희망나무 커뮤니티' 이사장이다. 희망나무 커뮤니티는 재능기부와 봉사활동으로 소아암 환자, 일본군위안부 할머니 등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단체다.

"선수 생활할 때 체중 감량이 가장 고통스러웠습니다. 배고픔의 고통이 어떤 건지 그때 알았죠. 그래서 고통받는 사람들을 돕겠다는 생각이 들었나 봐요."

양씨는 작년 11월 세종문화회관에서 70~80대 할머니들로 구성된 '인씨엠 힐링보이스'와 함께 일본군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오페라 갈라 콘서트를 열었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최고령인 최석순(84) 할머니의 아리아 열창에 눈물이 났습니다. 그 나이에 그런 열정을 가질 수 있다는 것, 혼신의 힘을 쏟는다는 것이 경이로웠죠."

양씨는 지금도 매일 아침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시합하면 누구한테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요. 나이 생각은 될 수 있으면 안 하려고 합니다. 지금도 레슬러란 게 중요하죠."

인터뷰를 마치고 악수를 청했다. 돌덩이를 쥐는 것 같았다. "지금도 매트가 좋다"는 그의 말이 실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