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릴라, 그녀는 조련사

지난 4월 경기도 파주의 VFX(시각효과) 스튜디오 '덱스터 디지털'에서 김용화 감독을 만났다. 그는 '오 브라더스'(2003년·400만 관객) '미녀는 괴로워'(2006년·662만 관객) '국가대표'(2010년·848만 관객) 등 세 편의 작품을 잇달아 흥행시키고 이곳에서 네 번째 작품인 '미스터 고'를 준비 중이었다. 김 감독에게 흥행 영화의 영감을 어디서 얻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주저없이 "여자"라고 답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지금껏 연애를 했던 모든 여자들"이라 했다.

3개월이 지난 10일, 완성된 '미스터 고'(17일 개봉)를 본 뒤에 김 감독을 다시 만났다. 그에게 "지금 하는 연애도 이 영화에 영향을 미쳤느냐"고 묻자, 그는 "나를 링링, 여자친구를 웨이웨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엔 사랑은 받는 것이라 생각했다면, 지금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행복하단 걸 깨달았다"고 했다. 고릴라 '링링'은 세상에 홀로 맞서야 하는 15세 소녀 '웨이웨이'의 곁을 지켜주는 우직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다.

―CG로 만든 캐릭터가 한국 상업영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처음이다. 무모한 도전 아닌가.

"나는 할리우드 키드다. 대학(중앙대 영화과)에서 영화를 공부할 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나 타비아니 형제와 같은 감독들의 예술 영화를 많이 봤다. 중요하고 의미가 있는 작품들이지만, 보면서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난 그때도 스필버그, 저메스키나 제임스 캐머런에게 더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영화는 판타지로 시작해서 판타지로 끝난다, 'ET'처럼. 언제가 힘을 응축해서 그런 영화에 도전해보고 싶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아예 사재(私財)로 VFX 스튜디오인 '덱스터 디지털'을 세웠다.

"처음에는 다른 회사에 맡겼는데 1년 만에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릴라가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이다. 다른 회사의 수많은 작업 중 하나가 돼서는 제대로 만들어내기 힘들다. 제임스 캐머런이나 피터 잭슨 감독도 '터미네이터'나 '반지의 제왕'을 만들면서 자기 회사를 차렸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한국의 내로라하는 VFX 수퍼바이저들이 함께하겠다고 나섰다."

―가장 힘들었던 게 뭔가.

"인내와 통제다. 내 맘대로 결과물이 안 나올 때마다 너무 화가 나고, 그 감정이 통제가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에게 화를 낼 수도 없고. 그리고 배우들에겐 웃는 연기, 찡그리는 연기를 마음대로 시킬 수 있지만 이건 캐릭터의 눈빛이나 표정이 바뀔 때마다 작업을 다시 해야 한다.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번 할 때마다 드는 시간과 비용이 너무 컸다."

허영만 작가의 만화 '제7구단'을 각색하면서 원작에는 없던 '10억원의 빚을 짊어진 10대 소녀'가 더해졌다. 벼랑 끝에 몰린 인간들을 등장시키고, 이들에게서 웃음을 끌어내다가 기어이 관객을 울리고 마는 게 김 감독의 장기였다. 하지만 이번 영화의 감정선은 얼기설기 기워낸 듯해 관객들의 감정까지 쥐락펴락하기엔 역부족이다.

―이번 영화는 전작들과 달리 관객들을 크게 울리진 않는다.

"세계에서 스페인과 한국 관객들의 감정의 폭이 가장 넓다고 들었다. 실제로 두 시간의 영화를 보면서 많이 웃다가 또 울기도 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재미를 살리고 싶었다. 누가 죽지 않아도, 울며불며 애원하지 않아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고릴라가 나와서 홈런을 치고 인간과 교감을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재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극한에 몰린 캐릭터나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끌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대학교 2학년 때 어머니가 중환자실에 입원하면서 병원비를 벌기 위해 채석장에서 돌 깨고 목욕탕에서 면도기 팔다가 결국 생선 장사를 했다. 하루에 고등어 1000마리 배를 갈랐다. 그때 혼수상태의 어머니를 보며 '사실은 어머니도 그냥 편히 가시고 싶은 게 아닐까'란 나쁜 생각을 했다. 인간이 고통스러워서 스스로를 바닥에 내려놓으면 그렇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나만 그랬던 걸까? 얼마나 많은 개인이나 가정에서 말 못할 고통을 갖고 있나. 날것의 고통을 들어 보이며 '고통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알아?'라고 얘기하는 건 관객들을 무시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영화는 고통받는 인간의 심연을 파는 것이라 고통을 얘기 안 할 수 없지만 표현방식은 달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영화 '미스터 고'는…]

100억 넘게 들어간 고릴라
털 한올한올까지 사랑스러워

중국 고아 서커스 단원인 웨이웨이(쉬자오)는 단장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남긴 10억원의 빚을 갚기 위해 고릴라 링링<사진>을 데리고 한국에 온다. 한국의 스포츠 에이전트 성충수(성동일)가 링링의 야구 실력을 알아보고 프로야구단 스카우트를 제안한 것. 시합 때마다 홈런을 날리는 링링은 야구계의 스타가 되지만 그를 이용해 돈을 벌려는 인간들의 욕심이 그를 위험으로 내몬다.

285㎏ 거구의 롤런드 고릴라 '링링'은 100％ 컴퓨터 그래픽(CG)으로 만든 캐릭터다. 3D로 만들어진 이 영화의 순 제작비 225억원 중 절반 정도가 CG에 쓰였다. 그 결과 바람에 휘날리는 털을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사랑스럽고도 생생한 CG 캐릭터가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