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 남편, 이 점자판으로 모든 것 기록했죠"

"남편이 평생 사용한 점필과 점자판이에요. 서울맹학교 학생 시절 대학생 봉사자인 나를 처음 만났을 때도 손에 들고 있었죠."

한국 시각장애인 최초로 미국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부시 대통령 재임 시기 미(美)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내고 지난해 타계한 고(故) 강영우<작은 사진> 박사의 부인 석은옥(71)씨는 옛 기억을 더듬듯 남편의 분신(分身)과도 같던 점자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A4용지보다 조금 작은 크기에 점자를 찍는 금속 기구가 부착된 나무판은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했다. "남편은 이 점필과 점자판으로 자기가 듣는 모든 것을 기록했어요. 주소록과 전화번호부도 직접 만들어 썼지요."

석씨는 점자판을 비롯해 각종 임명장과 훈장 등 남편의 유품 100여점을 경기도 양평군에 기증하기 위해 12일 한국을 찾았다. 강 박사의 고향인 양평군은 용문사 입구 친환경농업박물관의 '자랑스러운 양평인' 코너에 강 박사를 테마로 한 상설 전시관을 꾸미기로 했다. 유품 전달식은 16일 상설 전시관에서 열릴 예정이다. 맹인을 상징하는 흰색 지팡이, 70년대식 타자기, 부시 대통령에게 받은 임명장 등 미국서 날아온 유품마다 사연이 적지 않다.

"남편이 타자를 치면 항상 제가 옆에서 읽어줬죠. 틀린 게 나오면 고치고, 그렇게 논문을 쓰고, 책을 냈죠. 저 흰 지팡이…, 매일 출근길에 제가 건네줬던 것이에요. 그리고 녹음기도 있어요. 저랑 자원봉사자들이 읽고 싶어 하는 책을 일일이 녹음해줬지요." 물건마다 두 사람의 추억이 담겨있다. 일심동체로 보낸 반세기였다.

"집에 갖고 있는 것보다 고향에 이런 공간이 만들어진다니 가족으로서는 영광이죠. 용문사에는 관광객도 많다는데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들과 손주들도 이제 고국에 꼭 와봐야 할 곳이 생긴 것이니 얼마나 좋아요."

열네 살 중학교 시절에 축구공에 맞아 실명(失明)한 강 박사는 고등학생 나이 때 두 살 위의 '대학생 누나' 석은옥과 만났다. "1년은 장애인과 자원봉사자, 6년은 동생과 누나, 3년은 약혼자로 지냈고, 1972년 결혼했지요. 호호호!" 두 사람이 결혼하던 그해 조선일보에도 '시각장애인이 연세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 간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석씨는 "당시 남편은 '나는 시력 하나만 잃었을 뿐'이라며 결코 좌절을 모르는 사람이었다"면서, "'아, 저런 큰사람을 내조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했다.

소중한 물건들과 이별하는 석씨는 담담했다. "남편은 갑작스럽게 췌장암에 걸려 삶이 6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남은 생애를 정말 잘 정리했어요. 제게 편지를 쓰고 아이들에게도 썼지요. 기부할 곳도 찾고…. 마지막까지 책 원고 작업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아들들도 잘 컸다. "아빠 눈을 고쳐주세요" 기도했던 큰아들 진석(39)씨는 안과 의사가 됐고, 둘째 아들 진영(36)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바마 정부에서 백악관 선임 법률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석씨는 "남편도 장학금을 받아 공부한 분이었기에 항상 돌려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지난해 남편의 이름을 딴 '강영우장학재단'을 만든 것도 그 때문"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의 시각장애인들이 미국에 와서 공부할 기회를 좀 더 많이 가지면 좋겠다고 했다. 재단은 오는 26일 첫 이사회가 열리고, 내년부터 첫 수혜자가 나올 예정이다. 석씨는 "뭉텅이 기부금도 좋지만, 월 1만원씩 보내오는 이름 모를 기부자들도 늘고 있다"며 "앞으로 강영우장학재단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했다.

석씨는 말하는 내내 왼팔을 쓰다듬었다. 남편이 외출할 때면 평생 의지했던 자리다. 그녀는 "지금도 남편 오른손의 온기가 느껴진다"고 했다.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는 강 박사의 책 제목처럼 그녀도 "남편이 떠난 뒤 그의 빈자리보다 세상이 점점 밝게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