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전 '목욕탕 儀式'으로 시작된 전국~ 노래자랑

잔치와 소풍은 역시 당일보다 전날이다. 설렘 때문이다. 여기 33년째 매주 방방곡곡에서 푸짐하게 벌어지는 노랫가락 한 상(床)이 있다. 1980년 첫 방송한 국내 최장수 예능프로그램, KBS '전국노래자랑'이다. 그 중심에 선 '일요일의 남자' MC 송해(88·본명 송복희). 지난 12~13일 그와 함께 잔치 구경을 했다.

12일 오전 10시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앞 흰색 관광버스 안, 늘 그렇듯 송해는 출발 1시간 전부터 와 있었다. 상·하의 한 벌인 흰 모시옷에 흰 운동화, 굵고 힘있는 검은 눈썹. 창밖으로 연신 빗방울이 떨어졌다. "내일도 이러면 큰일인데…." 송해가 흘리자, "서울 밑은 날씨 괜찮대요" 신재동(54) 악단장이 받았다. 녹화는 토요일이지만, 송해는 악단과 함께 하루 일찍 해당 고장으로 내려가 그곳 바람을 쐰다. 동네 친화적인 진행을 위한 30년 된 습관이다. 녹화 장소는 충북 충주, 7년 만에 찾는 1671번째 무대였다.

오전 11시 출발한 이 버스 탑승자 10여명은 2진이다. 유웅식 PD를 비롯한 50여명의 제작진은 녹화 이틀 전에 미리 내려가 예심을 치르고, 세트를 설치한다. 오후 12시 20분, 점심식사를 위해 버스가 여주휴게소에 멈췄다. 인사 세례와 인파를 헤치고 휴게소 식당코너에 자리를 잡은 송해는 6000원짜리 해물순두부찌개를 시켰다. 신 단장은 "21년째 모시지만, 선생님은 뭐든 참 복(福)스럽게 드신다"고 했다. 1984년부터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며 전국의 별별 음식을 섭렵한 그는 자칭 잡식성이다. "아무거나 잘 먹어야 해. 깨작깨작 안 먹는 게 장수 비결이라고."

◇녹화 전 목욕탕 순례 30년

오후 2시 20분쯤 충주 연수동 한 모텔에 도착해 짐을 풀고 곧장 향한 곳은 목욕탕. 목욕은 송해에게 하나의 의식(儀式)이다. 주민들과 둘러앉아 담소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그 동네에 대한 촉(觸)이 온다고 했다. 앙성면 탄산 온천에 도착하자마자 송해를 알아본 직원의 통 큰 서비스가 시작됐다. 무료입장은 기본, 바나나와 삶은 감자, 맹동 수박, 감식초, 모시떡이 등장했다. 목욕탕 나무 평상(平床)에 앉아 두런두런 얘길 나누다 15분 뒤 욕장에 들어섰다. 샤워하는 송해의 등허리에 파스가 붙어 있다. "리허설부터 녹화까지 3시간은 서 있어야 하니 미리 붙여뒀다"고 했다. 목욕탕 마니아 송해는 평소 오후 4시쯤 되면 매일같이 서울 낙원동 자신의 사무실 부근 '에메랄드 사우나'엘 간다. "탕에 들어가 속으로 1200회를 세. 그럼 땀도 적당히 나고 몸도 풀리지."

뽀송뽀송해진 송해가 숙소에 도착하자, 카운터에 웬 원고지 묶음이 있다. '전국노래자랑' 22년차 정한욱(49) 작가가 맡겨둔 수기(手記) 원고다. 200자 원고지에 수성 사인펜으로 굵게 쓴 30장짜리 '아날로그 원고'를 송해는 5회 이상 정독하며 모두 외운다. 오후 6시 40분, 이종배 충주시장이 조동리 매운탕집에 자리를 마련했다. 빠가사리 매운탕, 사과주, 충주 막걸리 등 지역 특산물을 앞에 두고 고장 얘길 한다. 잔이 돌고, 얘기는 남한강의 풍광부터 인심, 땅값까지 술술 이어진다. 송해는 "이게 다 공부"라고 했다. 이날의 대화는 다음 날 공연 멘트가 된다. 자리를 파하자 오후 9시 30분. 송해는 오후 10시쯤 잠들어 오전 5시 30분쯤 일어난다. 송해의 바이오리듬이 곧 공연 스케줄의 처음과 끝.

공연 당일은 해가 쨍쨍했다. 오전 9시부터 11시 반까지 탄금호 국제조정경기장 야외무대에서 리허설이 시작됐다. 14명의 출연자가 무대 위로 올라와 예행연습을 한다. "자기소개가 밋밋하니깐 이따간 재밌게 해봐요." 리허설 진행은 정 작가가 맡았다. 객석 맨 앞줄엔 10명의 '전국노래자랑 응원단원'이 있다. 공연 스케줄을 꿰고 전국을 따라 돌아다니는 열혈 팬이다. 양 어깨에 태극기를 달고 방방 뛰는 '천안 태극기' 연제성(53)씨는 "춤도 추고 운동도 되고 기분 최고"라며 싱글벙글이었다.

◇공연은 계속된다, 관객 있는 한

오후 1시, 잔치가 시작됐다. "전국~" 송해가 외치자, "노래자랑!" 객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온다. 가수 박상철이 히트곡 '너무 예뻐', '빵빵', '무조건'으로 이어지는 3단 콤보를 작렬하자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40분 뒤, 느닷없이 큰비가 쏟아졌다. 10분 뒤엔 천둥·번개까지 치고 악단원 한 명이 빗물에 미끄러지기까지 했다. 공연이 중단되고 준비된 우비 1000여장이 살포됐다. 빗줄기가 거세졌지만, 시민들은 우비를 입은 채 자리를 지켰다. 20분 뒤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송해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어쩐지, 비가 곧 그칠 것 같더라니."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오후 3시 20분 공연이 끝났다. 물티슈로 화장을 지우던 송해가 말했다. "이 정도 비야 아무것도 아니지. 공연은 계속 되는 거야. 사람들이 있는데 별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