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릇 깨본 여자가 그릇도 잘 만들죠

명함을 내미는 오동은(48) 한국로얄코펜하겐 대표의 두 손엔 핑크색, 연두색 매니큐어가 곱게 칠해져 있었다. "고3, 고1 두 딸 아이와 시아버님을 모신 주부거든요. 주말엔 하루 여섯 번씩 식구들 밥상을 차릴 때도 있어요. 고객과 명함을 주고받을 때 손이 거친 게 눈에 띌까 봐서요."

덴마크에 본사를 둔 '로얄코펜하겐'은 덴마크 왕실에도 납품하는 유럽 대표 식기 브랜드다. 한국엔 94년 지사가 설립됐다. 경기 불황에도 한국에서 3년 연속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 중이고, 올해는 작년 대비 30%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지난 1월 한국로얄코펜하겐은 한국인의 식생활에 맞는 밥그릇, 국그릇을 출시했다. 콧대 높은 유럽 본사가 특정 지역 소비자들을 위한 상품을 출시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한국 소비자를 위해 특화시킨 이 상품은 한 달 만에 4개월치 판매량이 팔려나갔다.

이를 진두지휘한 것이 오 대표다. 직접 살림을 해본 그는 한국 주부들이 우리와 식문화가 다른 유럽산(産) 식기류를 낯설지 않게 쓸 수 있으려면 한국 식문화에 맞는 그릇을 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밥그릇이 어느 정도로 오목해야 뜨거운 밥의 온기가 오랫동안 유지되는지, 국그릇 지름과 각도가 얼마쯤 되어야 국을 엎지르지 않고 그릇을 안전하게 식탁까지 옮길 수 있는지까지 조사했다. 살림을 해본 여자가 아니면 생각해내기 쉽지 않은 섬세함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 등에서 한국 전통 유기와 백자에 대한 자료를 뒤지고, 전문가들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본사가 오 대표의 의견을 반영해 만든 석고 그릇 모형 수십여 가지를 보내오자 직접 써 보며 밥그릇 밑에 있는 받침대가 그릇을 잘 지탱하는지, 디자인과 그릇에 담긴 음식물이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지도 확인했다. 본사 직원들을 한식당에 초청해 한국식 상차림부터 어떤 종류의 반찬을 어떤 그릇에 담아내는지, 각 음식에 담긴 역사와 에피소드는 무엇인지까지 하나하나 설명하며 우리 식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높였다.

"디테일 하나하나까지 놓치지 않고 완벽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여성들의 강점이라고 생각해요. 반면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며 타인의 생각을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게 여성들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죠. 조직 생활을 하는 여성들은 지금보다 더 열린 시각과 유연성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1989년 대학(이화여대)을 졸업하고, 2011년 로얄코펜하겐으로 옮기기까지 첫 직장(월드키친)에서 부사장·사장을 역임했다. 외국계 기업을 선택한 것은 남성 중심적인 한국 기업에 들어가 유리천장을 뚫는 데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평등한 조직 문화 속에서 열심히 일하는 데 에너지를 쓰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성차별은 외국계 기업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힘들었죠. 하지만 '힘들다' 불평만 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어요. 동료 남자 직원이 100만큼 성과를 낸다면 전 한 단계 위를 목표로 잡고 110, 120을 만들려고 노력했어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을 놓고 남녀 차별을 하긴 어려우니까요."

오 대표도 가사·육아와 직장을 병행하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시부모님과 가족이 격려해주었다고 한다. 그런 경험이 있어서인지 한국로얄코펜하겐에는 여성들이 편하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돼 있다. 자녀를 등·하교시키고 출근할 수 있도록 출퇴근시간을 조절할 수 있는 탄력근무제를 시행하고, 연말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10일 이상 휴가를 준다. 하지만 근로 환경의 변화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오 대표의 생각이다.

"전 여자 후배들에게 늘 '수퍼우먼은 없다'고 말해요.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말고 가족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함께 조금씩 힘을 나누고 희생하는 것이 여성들이 일과 직장을 병행할 수 있는 해결책이라 생각합니다."